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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느 하루


 

 

 

 


                         

      학생은 누군가와 통화 중이었다. 등 뒤에 검은 가방이 매달려 있었고 그 위에 모자가 두개나 얹혀 있었다. 두개 다 상의에 부착된 모자였다. 가방 중간쯤에 자크가 열려 있었고 책이 한권 꽂혀있었다. 윗부분에 쓰인 제목이 영어처럼 보였지만 쉬이 읽히질 않았다.

  김기사는 단어를 알파벳으로 하나하나 읽다 관두고 수심이 가득한 남학생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가로와 세로의 비율이 비슷할 정도로 넙죽한 얼굴이었다. 눈은 큰데다 입을 약간 벌리고 있어 치밀함과는 거리가 있어 보였다. 키와 몸집은 컸지만 나이는 스물 두셋 정도나 될 것 같았다. 차림새나 얼굴에서 들뜬 모습을 볼 수 없었기 때문에 새내기 대학생으로 보이진 않았다. 교복에서 벗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다면 옷차림과 머리에 신경을 더 쓰는 게 정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학생을 쳐다보면서 커피를 홀짝거리던 김기사는 팔목을 들어서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10분 정도 여유가 있었지만 버스의 계단을 밟았다.

  김기사가 앉자마자 휴대폰을 접은 그 학생이 뒤따라 올라왔다. 풀죽은 표정을 짓고 고개를 약간 숙인 채 들어오는 학생은 세 번째 줄 의자에 앉았다. 학생은 얼굴을 찌푸린 상태로 입 가장자리에 엄지손가락을 대고 있었다. 김기사는 백미러를 통해 승객들을 전부 쳐다보았다. 다해봐야 승객은 열명 남짓이었다. 출발 3-4 분 전이었을 무렵 갑자기 학생이 일어서더니 통로로 나왔다.

  “이 차가 대전에 몇 시 쯤 도착하는지...  동부 터미널까지 30분 만에 갈 수 있을까요?”

  학생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웅얼거렸다.

  “글쎄...좀, 어려울 것 같은데...”

  넙데데한 학생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김기사는 머리를 흔들었다. 너무 빠듯한 시간이었다. 게다가 퇴근 시간과 맞물리기 때문에 시내의 도로는 혼잡할 터였다. 그 도시에서 시내버스를 몰아보진 않았지만, 동서간의 터미널 사이를 버스와 택시를 각각 이용할 때, 어느 정도의 시간이 걸리는지 대충 알고 있었다. 씁쓰름한 약을 물고 있는 듯한 학생의 표정을 보면서 기사는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죄송합니다."

  학생은 김기사의 옆 얼굴에 꾸뻑 인사를 했다. 학생이 내려가는 계단을 밟으면서 속도를 내자 등 뒤에 매달린 두개의 모자가 각기 따로 덜렁거렸다. 학생이 나간 후 승객은 더 늘어나지 않았다.

  출발시간 2분전쯤 기사는 의자에서 일어섰다. 전주를 경유하지만 10명 남짓한 승객이라 표를 회수하는 게 편했다. 딱 한 손님 때문에 맨 끝 통로까지 갔던 기사는 빠른 속도로 앞자리까지 왔다. 세 번째 줄에는 아무도 앉아 있지 않았지만 무엇인가가 의자에 놓여있었다. 지갑이었다. 기사는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지갑을 집어들었다.

 

 

    시외버스에 오른 박군은 버스 앞에 매달린 디지털시계를 연신 쳐다보았다. 버스를 바꿔 타야하는 대전의 터미널이 동 서로 나뉘어져 있다는 점이 가장 큰 딜레마였다. 더러 머리가 잘 돌아가는 택시 기사를 만나면 총알처럼은 아니더라도 굼벵이처럼 달리지 않을 수도 있었다. 퇴근시간과 겹친다는 악재만 아니라면 손톱을 물어 뜯어가면서 고민을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표를 끊는 여자가 시간이 촉박하다는 말을 했었다. 시계를 쳐다보니 3-4분 후면 버스가 출발한 시간이었다. 박군은 자리에서 일어나 앞쪽으로 걸어 나왔다.

  차가 몇 시쯤 대전에 도착하느냐는 박군의 말에 기사는 시간을 얘기하면서도 확신을 할 수 없다는 투였다. 하긴 시외버스 또한 퇴근 시간대에 도시에 진입을 할 것이니 기사는 그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박군은 기사에게 죄송하다는 말을 하고는 시외버스에서 내렸다.

  박군은 표를 돈으로 바꾸고 터미널에서 나와 시내버스를 탔다. 목포역으로 가는 버스였다. 버스에서 어머니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어머니는 무모하다며 집으로 돌아오라는 얘기를 거듭했지만 돌아가면 시간 낭비라는 생각이었다. 어머니가 사는 집은 작은 읍이었기 때문에 차도 드물게 다녔고 밤이면 너무 조용해서 끔찍했다. 게다가 오늘은 학교에 가서 선배와 친구들을 만나야 했다. 약속을 번복하게 되면 연락을 취했던 모든 사람들에게 다시 전화를 해야 하니 매우 귀찮을 수밖에 없었다. 박군은 어머니에게 기차시간을 알아봐 달라는 얘기를 하고 전화를 끊었다.

  몇 분이 지나지 않아 어머니에게 전화가 왔다. 구세주는 대전을 경유하는 KTX였다. 아니 늦은 시간까지 운행하는 충북선이랄 수 있었다. 시간이 맞아 떨어지니, 대전에서 충북선의 시발역인 조치원까지 가기위해 갈아타는 번거로움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충북선은 이름처럼 충북을 가로질러 다니는데 웬만한 소도시는 다 들렀다. 말하자면 통일호 같은 무궁화호였다. 이용하는 승객이 많지 않아 항상 자리가 남아도는 열차였다.

  하차를 하는 역은 학교와는 거리가 좀 떨어져 있지만 소형 승용차를 가진 친구가 그 부근에서 살기 때문에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 듯싶었다. 목포역 광장에 들어 선 박군은 시간이 좀 남아 광장 귀퉁이에 있는 피시방으로 갔다. 평일이기에 급할 게 없다는 생각이었다. 박군은 버스터미널에서의 상황은 벌써 잊고 있었다.

  채팅공간에 접속을 했지만 친구들이 없었다. 10여분을 기다리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주변에 음식점이 많았지만, 점심은 기차 안에서 해결하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역사로 들어갔다.

  박군은 벽에 붙은 기차요금표를 쳐다보면서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가 뺐다.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 손에 들었던 휴대폰을 상의 주머니에 넣은 다음 그 외의 주머니를 뒤지기 시작했다. 어느 주머니에도 지갑은 없었다. 박군은 엮어진 굴비처럼 한 줄로 나란히 있는 붙어있는 플라스틱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가방을 뒤지다가 옆 의자에 내용물을 쏟아냈다. 가방 바닥에서 굴러다니던 동전까지 나왔지만 지갑은 없었다. 생각해 보니 피시방이 의심스러웠다. 게다가 형광등이 거의 소등이 되어 있었으므로 적당한 어둠을 머금고 있는 곳이었다. 박군은 기차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을 하면서 피시방으로 뛰어갔다.

  “지갑이요? 못봤는데요?”

  마치 되묻는 것처럼 들렸다. 실내에서 모자를 쓰고 있는 게 미성년자들의 특권일 수는 있었지만 눈에 거슬렀다. 어쩌면 미성년이 아니라는 표현을 하고 싶어서 모자를 착용하고 있을 수도 있었다. 박군은 코밑의 털이 까무잡잡한 검은모자가, 제대로 된 시급을 받지 못해도 말을 할 수 없는 미성년임이 틀림없다는 생각을 했다.

  “여기 올 때까지는 지갑이 있었는데... 여기다 빠뜨린 것 같거든요.”

  아무리 생각해도 시내버스에 앉아 있을 때까지 지갑이 있었던 것 같았다. 버스에서 내릴 때 한쪽 손에는 휴대폰, 반대편 손에 지갑을 들었을 거라는 확신을 갖는 건, 내리면서 계단에서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기 때문이었다. 양쪽 손이 부자유스러운 상태를 말해주는 대목이랄 수 있었다. 박군은 도벽이 있을 것처럼 얼굴에 광대뼈의 그늘이 있는, 검은모자를 빤히 쳐다보았다. 찬찬히 보니 꼭 퇴학생 같았다.

  “아무것도 없.었.다.고.요.”

  스타카토를 넣어 말을 하는 검은모자는 그때 마침 들어오는 손님을 맞이하느라 박군에게서 시선을 떼었다. 새로 온 손님은 박군을 밀어내듯 안으로 들어갔고 박군은 떠밀려서 뒷걸음질을 쳤다. 다시 다가가자 검은모자는 인상을 쓰더니 목소리를 높였다.

  “사장님 여기 좀 보세요.”

  “무슨 일이야?”

  사장의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쳐다보니 목이 잠바의 칼라에 쑥 들어가 있어 자라를 연상시키는 중년남자였다. 상체가 유난히 뚱뚱한 그 남자는 간헐적으로 눈을 깜빡였다.

  “지갑이 없어져서...”

  박군이 말을 얼버무리는 동안 사장의 눈이 너덧 번이나 감겼다가 떠졌다.

  “몇 번 자리였는데?”

  “31번이요.”

  검은모자가 재빨리 대답을 했다.

  “너, 지갑 봤냐?”

  “아이 참, 없었다니까요.”

  턱을 꺼떡거리면서 대답을 하던 검은모자는 모자의 챙을 위쪽으로 꺾었다. 윗입술이 들려 있었고 볼이 부풀어 있었다.

  “여긴 아닌 것 같네요. 딴 데서 찾아보세요.”

  여전히 미소를 띤 채 말을 하는 사장의 표정이 아이러니해 보였다. 사장은 곧장 몸을 돌렸고 박군은 밖으로 나왔다. 문을 밀자마자 거울에서 반사된 것처럼 햇빛이 눈을 찔렀다. 박군은 도둑놈들, 이라는 말을 중얼거리며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잠시 후 유달리 무게감이 느껴지는 휴대폰을 들고서 통화버튼을 꾹 눌렀다. 

 

 

    햇살이 커튼을 비닐처럼 투명하게 만들고 있었다. 창을 열자 부유하던 방안의 먼지가 회오리를 일으켰다. 커튼이 임산부 배처럼 부풀면서 펄럭거렸다. 서여인은 커튼을 창 가장자리로 밀고서 침대 한쪽에 밀려나 있는 이불을 끌어안았다. 이불에 아직 온기가 남아 있었고 체취처럼 익숙한 냄새를 풍겼다.

  거실에 나와서 애완견을 밖으로 몰아냈다. 정확히 말하자면 애완견은 현관문을 열자마자 뛰어 나갔다. 며칠 전 털을 밀었기 때문에 아직은 벌거숭이나 마찬가지였다. 애완견의 이발은 아들의 솜씨였다.

  욕실로 들어간 서여인은 비눗물에 이불을 담갔다. 욕조에 집어넣은 이불은 장롱에서 꺼낸 것까지 합쳐 석장이었다. 세탁기에 돌리게 되면 아침에 솟아오른 태양의 혜택을 받을 수가 없을 것 같아 손빨래를 하기로 마음 먹었다. 장화를 신고서 지근지근 밟던 이불을 하나씩 끄집어내서 다라이에 담았다. 한 시간쯤 허덕거리자 겨우 이불빨래가 끝났다.

  이불을 밖의 줄에 널고 들어와 콘센트에 꽂힌 청소기 코드를 뽑았다. 그 자리에 드라이기 코드를 꽂고 밖에서 놀던 애완견을 불러들여 씻겼다. 드라이기로 몸을 말리는 동안 애완견은 서너 대나 맞았다. 마치 쟁기를 끄는 황소마냥 앞다리에 힘을 주면서 도망치려고 안간힘을 썼기 때문이다. 제대로 말려주지 않으면 감기에 걸릴 수도 있었다. 겨울 내내 보일러를 틀지 않은 거실은 사월이 왔어도 여전히 겨울이었다.

  점심을 먹으려고 냉장고를 열던 서여인은 냉장고의 불이 켜 있지 않아 의아하다는 생각을 했다. 냉장고의 문을 닫고 냉동실의 문을 열었다. 냉동실의 봉지마다 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최근 몇 년 동안 잔 고장을 여러 번 일으킨 냉장고였다. 냉동실의 문을 닫고 누르께한 냉장고를 표면을 한참 쳐다보았다. 원래의 빛깔은 상큼한 베이지색이었다. 아들이 두 돌이 채 되기 전에 샀으니 18년 이상이 된 것 같았다. 형편이 좋은 건 아니었지만 바꿀 수밖에 없었다.

  서울에 사는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그 친구는 저렴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 친구가 알려준 인터넷 쇼핑몰에 어렵사리 들어가 제품을 구경하던 서여인은 컴퓨터를 닫았다. 배달되어 오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고 은행에 입금을 해야하는 번거로움이 있었다. 카드를 사용하지 않다보니 그 방법밖에 없었다. 차라리 물건을 보고 사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쇼핑몰에서의 냉장고 가격을 종이에 적었다.

  서 여인이 살고 있는 읍 소재지에 근접한 도시에도 Y마트가 있었다. 입이 큰 배우가 광고 모델이었는데 싸다는 표현에 잘 어울리는 이미지였다. 전화를 해서 물어보니 인터넷쇼핑몰에 비해 가격이 비쌌다. 마트 직원에게 인터넷에서의 가격을 얘기하자 ‘맞춰 드려야지요, 라며 매장에 찾아와 본인을 불러달라고 헀다.

  허겁지겁 잠바를 걸치고 밖으로 나왔다. 햇살 때문에 옷 빛깔이 우중충해 보여서 다른 옷을 입을 걸 그랬나하는 생각을 했지만 마땅한 옷이 떠오르지 않았다. 정류장까지 가는데 바람이 장난이 아니다싶을 정도였다. 하필 마을 어귀의 정류장에는 안내장이 붙어 있었다. 버스의 행선지가 그려진 약도였는데 아래쪽에 요금이 쓰여 있었다. 요금은 비싸졌고 정류장은 상당히 멀어진 셈이었다.

  냉장고까지 새로 바꾼다는 생각을 하니 설상가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며칠 머물던 아들이 돌아간 날짜가 31일이었는데 그때까지 정류장은 마을 어귀에 있었고 버스비는 종전대로였다. 재미삼아 가벼운 거짓말을 해도 되는 만우절이었지만, 서여인에게는 잔인하다할 수 있는 4월의 첫날이었다.

  읍내까지 걸어가는 동안 바람 때문에 머리가 산발이 되었다. 5층 건물 앞에 정류장이 있었다. 집으로 들어올 때 늘 지나치는 정류장이었기 그 전과는 반대 방향이랄 수 있었다. 정류장의 푯말은 예전 것이어서 행선지를 거꾸로 가리키고 있었다. 건물은 그늘을 만들면서 정류장까지 바람의 통로로 만들고 있었다. 콧물이 흐를 무렵 버스가 왔다.

  “정류장이 바뀌었네요.”

  서여인이 콧물을 닦아내면서 말을 하자 기사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간혹 보던 얼굴이었는데 선글라스를 벗고 있어 늙어 보였다. 서여인이 쳐다보고 있었지만 기사는 부연설명을 하지 않았다. 서여인은  앞자리에 앉아 있다가 Y마트 부근에서 하차했다. 

   Y마트의 입구에는 색색의 풍선이 아치형의 조립대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게다 음악소리까지 바깥으로 흘러나와서 마치 행사라도 열리는 것처럼 보였다. 도시에서 벗어나 산 세월이 길었기 때문에 오히려 이질감이 느껴졌다. 매장 안에 들어서면서 서여인은 갑자기 난장이가 된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매장의 모든 제품들이 몇 년 사이에 지나치리만치 대형화된 것 같았다.

  이번에 아들을 마주하면서도 부쩍 커버렸다는 느낌을 받았었다. 헤어질 때 아들은 고교 일년생이었다. 그동안 아들은 수험생이라서 바빴고 서여인은 삶이 너무 고단해서 서로 마주할 기회를 만들지 못했다. 게다가 이혼하자마자 지도의 발부리 근처에 내려와 살 수밖에 없었고 계속 직장에 다녀야했기 때문에 짬도 여유도 없었다.

  전화를 받았던 직원이 올 때까지 커피를 마시면서 매장을 둘러보았다. 아들처럼 키가 커다란 에어컨이나 냉장고도 있었지만 소소한 물건도 많았다. 매장을 둘러보는 동안 집안에 있는 가전제품 중 멀쩡한 게 있을까하는 의문이 생겼다. 생각해보니 이혼 전에 비해 너무 초라한 삶이었다.

 당시 일부러 아들을 떼어 놓은 건 아니었지만 아들은 서여인을 따라나서지도 않았다. 그 부분은 아직까지도 매듭이 지어지지 않는 얘기였다. 때마침 직원이 왔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서여인은 탁자위에 눈물을 쏟아낼 뻔했다.

  직원을 따라 냉장고 앞으로 간 서여인은 냉장고를 몇 번이나 어루만졌다. 디자인은 구식이었지만 냉장고는 미백을 한 치아처럼 깨끗한 빛깔이었다. 다음날 배달을 한다는 말을 듣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Y마트 건너편에 버스정류장이 있었다. 사거리와 근접해 있는 그 정류장에 서여인은 혼자 서 있었다. 버스가 다가오자 돈을 쥔 손으로 사래를 쳤다. 중간에 옆 A슈퍼에서 산 식품까지 손에 들려있어서 손을 높이 올릴 수는 없었다. 차는 서여인 앞을 지나 쏜살같이 달렸다. 황당해하며 쳐다보던 서여인은 사거리의 신호등에 빨간 불이 들어와 있는 걸 보고 버스를 향해 달렸다. 멎어있던 버스의 문이 열렸다.

  “정류장이 아닌데서 차를 타면 됩니까?”

  버스에 오르자마자 기사가 호통을 쳤다. 나오는 길에 이용했던 버스였고 그 기사였다.

  “정류장에 서 있었는데 차가 그냥 갔어요.”

  서여인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하며 운전기사는 몇 번 더 호통을 쳤다. 적반하장이었지만 피곤했기 때문에 서여인은 입을 다물었다. 기사는 신호등이 빨간불로 바뀌기 전에 사거리를 통과할 욕심으로 달렸던 것 같았다. 서여인이 앉아 한숨을 돌리고도 2분 정도 지나서야 신호등이 파란불로 바뀌었다. 

  집에 오자마자 들고 있던 비닐봉지를 놓고 이불을 걷었다. 서산에 덩그러니 얹혀져있는 해는 새빨간 빛깔을 띠고 있었지만 이미 온기를 잃은 것 같았다. 현관문을 열자 거실에는 벌써 어둠이 스며들고 있었다. 불을 켜고 이불과 비닐봉지를 들여 놓았다.

 우선 냉장고의 안의 잡다한 것들을 해결해야 했다. 급한 대로 김치냉장고에 미리 옮기기는 했지만 나머지도 적당한 곳을 정해 쌓아두어야 할 것 같았다. 거실이 쌀쌀했기 때문에 큰 문제는 아닐 것 같았다. 헌 냉장고를 그들이 가져갈 거라는 생각에 대충 닦던 서여인은 행주를 던지고 급히 전화기로 갔다. 다행히 Y마트의 직원은 퇴근하지 않고 있었다.

  “내일은 일이 있으니 모레 배달을 해 주세요.”

  마치 종이에 쓰인 글자를 읽듯 서여인은 천천히 말을 했다. 내일의 일정을 떠올리자 기분이 점점 다운되기 시작했다. 밤 늦도록 잠이 오지 않아 서여인은 냉장고에서 소주병을 꺼냈다. 서여인은 잠자리에 들기 전 알람 시간을 새벽 5시 30분에 맞췄다.

  목이 말라서 깨어보니 새벽 3시였다. 냉장고 문을 무심코 열던 서여인은 문을 닫아버리고 커피포트를 들어 꼭지에 입을 댔다. 물을 마시다 말고 서여인은 낡은 냉장고를 멍청히 바라보았다. 턱을 타고 흐른 물이 티셔츠에 똑똑 떨어지고 있었지만, 물기를 닦아낼 생각도 못한 채 콘센트 앞으로 다가갔다.

  줄을 따라가 보니 청소기 코드가 꽂아져 있었다. 목욕 시켰던 애완견을 말리려고 드라이기의 코드를 꽂으면서 뽑아버린 게, 청소기 코드가 아니라 냉장고 코드였던 것이다. 서여인은 한숨을 내쉬면서 드라이기 코드를 빼버리고 그 자리에 냉장고 코드를 꽂았다. 꽂는 순간 윙 소리가 나고 뒤이어 물이 흐르는 소리가 났다. 멀쩡한 물건을 버린다는 생각을 하니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이틀 전 역에 있다던 아들과의 통화가 떠올랐다.

  “엄마. 지갑이 없어졌어.”

  아들은 감정을 억제하느라 짤막하게 말을 했다. 순간 서여인은 심장의 박동수가 올라가는 것을 느꼈지만 생각을 얼른 바꿨다. 아들의 심정을 알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럴 수도 있는 거지. 얼른 집으로 돌아 와. 차비가 없으면 택시로 와라. 길에 나가 있을테니...”

  입대를 하는 아들은 대학 친구들과도 송별식을 할 예정이었다. 충북의 국립대학에 다니는 아들은 대학 근처에서 자취를 하고 있었다. 주머니에 여분의 돈이 있다는 말을 듣고 가슴을 쓸어내리던 서여인은, 혹시나 해서 터미널 분실물센터로 전화를 했다. 아가씨가 받았다. 서여인은 아들 이름을 댔다.

  “아...여기에 있네요.”

  시외버스기사가 분실물센터에 지갑을 맡기고 갔다는 말을 아들에게 전하면서 서여인은 눈물을 닦았다. 지갑에는 아들이 아르바이트를 해서 번 돈이 들어있었다. 아침 일곱 시 반에 목포역에서 논산행 기차를 타면 입대를 할 아들을 만날 수 있었다. 어제 오후에 머리를 박박 밀었다는 아들이 당장 보고 싶었지만 오전 10시까지는 참아야만 했다. 서여인이 예매를 한 기차표는 논산역에 9시 59분쯤 도착할 예정이었다.

  서여인은 침대에 누워 생각에 잠겼다. 아침 일찍 터미널에 들러 아들의 지갑을 찾을 예정이었다. 분실물센터에 비싼 드링크제라도 한 박스 들이밀어야겠다는 마음을 억었다. 또한 생각해보니 한여름에 고장이 나서 냉장고를 바꿔야한다면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아들도 2년 후면 제대할 것이고 그 시간만큼 성숙해 질 것 같았다. 서여인의 기분은 한결 좋아졌다. 알람시계의 벨이 울리려면 두 시간 정도 기다려야 했다. 침대에 누워있던 서여인의 눈꺼풀이 스르르 감겼다.

 

 

 

                                                                  -끝-

 

 

 

 

 

 

김은숙   2007-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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