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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항아리 속의 남자


 

                         

 

   겉옷까지 입은 나는 몸에 이불을 둘둘 감은 채 벽에 기대앉아 있다. 여름인데도 으슬으슬 한기가 든다. 나는 봄볕 아래 모로 누워 있는 병든 닭처럼 벽에 기대앉아 하루를 보낸다. 하루에 한번씩 먹어야하는 약은 나를 무기력하게 한다. 손가락 끝조차 움직일 힘이 없어 마치 멍석말이라도 당한 느낌이다. 갑자기 심장에 통증이 느껴져서 나는 굼벵이처럼 몸을 동그랗게 말고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다.

통증이 멎자 벽에 기댄 채 눈을 감고서 조각조각 떨어져있는 그때의 상황들을 연결해 이야기로 만들어 간다. 낱개로 있던 조각의 퍼즐을 순서대로 꿰어 맞추듯이.



내가 살던 아파트 단지는 상류층이었고 건너편의 임대 아파트는 빈민가였다. 상류층 주민들은 2키로 남짓 떨어져있는 백화점이나 거기보다 더 떨어져 있는 할인 마트에 가서 쇼핑을 했다. 임대 아파트 단지 내의 T마트는 달동네와 임대 아파트 주민들이 이용하기 때문에 식료품에 속하는 것들은 대부분 쌌지만 건너편 상류층 주민들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11평에서 15평대인 임대 아파트처럼 T마트도 추레한 꼴을 하고 있었다. 여름에는 아예 물건을 내어놓고 팔아 길거리까지 어수선할 정도였다. 응달진 쪽으로는 더러운 물이 고인 채 얼은 상태로 봄까지 가곤했다. 날씨가 풀리면 연탄 빛깔을 띠고 있는 얼음이 녹으면서 길은 늘 질척거렸다. 마트 앞보다 작은 상가가 밀집해 있는 달동네 쪽으로는 더 지저분했다.

T마트에서 별로 떨어지지 않은 곳에 전봇대가 하나 있었다. 마트에 가던 나는 구석진 곳에 서 있는 전봇대에 ‘씹새끼 한쪽 발 들어!’라고 휘갈겨 쓴 글자를 보았다. 이슥한 시간이면 취객들이 종종 소변을 보는 모양이었다. 빨리 지우지 않아 보았을 테지만 그때 나는 살벌한 느낌을 받았다. 대형 마트에 들어서자 생선 냄새가 달려들어서 비위까지 상했다. 볼일만 보면 그만 이라는 생각은 하면서도 꺼림칙했다. 그 후로 나는 그쪽 단지의 T마트를 가지 않았다.

임대 아파트가 들어선지 10년도 더 지났을 때 우리 단지는 막 입주를 시작했다. 우리 단지는 오십 평형대가 주를 이루고 있었고, 그린벨트로 묶여 있던 산을 개발해서 경치도 그만이었다. 임대 아파트는 단지 수도 많았지만 건물이 빽빽이 들어서서 인구밀도도 높았다. 그 단지는 관리에 신경을 쓰지 않아 화단과 길의 구분이 없을 정도였다.

우리 단지의 입주가 마무리되면서 한 가지 걱정거리가 생겼다. 거의 완공되어가는 신설 학교에 관한 문제였다. 신설 초등학교와 중학교에 임대 아파트 단지의 아이들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말이 유언비어처럼 떠돌았기 때문이었다. 불상사를 막기 위해 단지 내 사람들이 모임을 갖곤 했다. 꽤 시끄럽긴 했지만 다행이 구가 달라서 그 일은 관철이 되지 않았다. 그 후 우리단지의 주민들은 약속이나 한 듯 건너편 T상가를 이용하지 않았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그 임대 아파트에는 우민과 서진 부부가 살고 있었다.

우민은 십여 년 전까지 내 부하 직원이었다. 정확하게 말한다면 한 오 년 정도 내 부하직원으로 근무했었다. 상고를 갓 졸업하고 들어온 우민은 머리가 짧았다. 목이 가늘고 하얀 얼굴에 여드름이 몇 개 솟아있어 소년 같은 이미지였다. 

"저..."

콧등으로 흘러내린 안경을 밀어 올리면서 쳐다보니 우민은 결재서류를 든 채 엉거주춤 서 있었다. 기껏해야 결재서류의 겉표지가 비닐 천에 지나지 않는데도 우민은 무거운 물건을 들고 있는 것 같은 자세였다. 나는 손을 내밀어 서류철을 받으면서 웃어 보였다.

"아...됐어요."

서류를 훑어 본 후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야 상기되었던 우민의 얼굴빛이 제대로 돌아 왔다. 일이 잘못되었을 경우에도 말하기가 난처할 정도였다. 우민은 내가 언성을 높이면 얼굴이 새빨갛게 변하곤 했다. 우민의 표정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높였던 언성을 낮추곤 했다. 우민이 일에 익숙해지면서 다른 직원에 비해 오히려 신뢰감이 생겼다. 전혀 때가 묻지 않은 우민의 성격에 호감을 가졌던 것 같았다. 우민이 회사를 그만두면서 나도 차츰 그를 잊었다.

내가 오랫동안 몸을 담고 있던 그 회사는 수영장이 개장하기 직전 동해안으로 연수를 가곤 했다. 연례행사였는데 시기는 거의 유월 말쯤이었다. 적당히 덥고 해변에 별로 사람이 없어 직원들끼리 지내기는 그만이었다. 물론 반라의 젊은 여자들을 보지 못한다는 것에 대해 일부는 불만스럽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그 해 여름에도 어김없이 콘도로 연수를 갔는데 떠난 날 꽤 더웠던 것으로 기억된다.

서울에서 아침에 출발을 했지만 중간에 점심을 먹다보니 콘도에 도착했을 때는 오후 4시가 넘어 있었다. 직원들이 함께 머무는 콘도는 바다와 매우 가까웠다. 풀이 듬성듬성 돋아있는 공터를 지나면 바로 모래사장이었다. 젊은 직원들이 짐을 푸는 둥 마는 둥하고 밖으로 나갔다. 대부분 슬리퍼를 신었지만 몇몇 직원들은 맨발로 바다를 향해 뛰었다.

나는 천천히 콘도를 나섰다. 몇 사람이 바닷가에서 서성이고 있었고 해수욕을 하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유월 말이긴 했지만 해가 많이 기울어 있어 수영을 하기에는 물이 차가울 듯싶었다. 젊은 직원들 몇 명이 옷을 입은 채로 얕은 곳에서 물장난을 하고 있었다. 나는 모래밭에 앉아 담배를 빼 물었다.

담배를 몇 모금 빨면서 내 발등에 걸쳐진 그림자를 보았다. 석양이 만들어내는 긴 그림자가 전혀 움직이지 않아 바위가 아니라면 세워둔 물건 같았다. 나는 천천히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남자의 뒤통수가 내 쪽을 향하고 있었다. 머리를 빡빡 밀어 모자를 쓴 것 같긴 했지만 나이가 들어 보이는 옷차림이었다. 나는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그가 바라보는 곳이 어디인지 가늠해보려고 그 방향으로 시선을 던졌다. 모래사장이 끝나는 곳에 있는 작은 바위산인 것 같았다. 바위틈에서 자라난 소나무 한 그루가 비스듬히 서 있는 게 보였다. 장소가 좋지 않아 기형으로 자란 소나무였다.

파도가 밀려오다 바위의 아랫부분에 부딪쳐 조각이 나면서 사방으로 튀고 있었다. 그쪽을 한참 바라보는데 무엇 때문인지 그 남자가 얼굴을 돌렸다. 나는 얼결에 남자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새하얀 얼굴에 두 눈과 두 볼이 검은빛을 띠고 있었다. 어디서 보았는지 생각은 잘 나지 않았지만 가면을 쓴 얼굴 사진 같았다. 모자를 눌러 쓴 그 얼굴이 너무 이상해서 나는 고개를 재빨리 돌려 버렸다. 다시 쳐다보았던 것은 호기심 때문이었다. 그때까지 그 남자는 나를 줄곧 바라보고 있었던 것 같았다.

“정 대리님 맞죠?”

그 남자가 몸을 반쯤 일으키면서 그렇게 말하자 나는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안녕하세요? 저 서우민이에요”

내 얼굴을 빤히 보던 그가 인사를 하는 순간 내 손가락 사이에 끼워져 있던 담배가 툭 떨어졌다.

“아...”

나는 입을 벌린 채 그를 한참 쳐다보았다. 두 손을 모아 쥐면서 우민은 얼굴에 약간의 웃음을 담았다.

“아니... 왜?”

몸이 왜 그러느냐고 물어야하는데 말이 나오지 않았다.

“몸이 좋지 않아서요.”

간단한 대답이었지만 느낌은 간단치가 않았다. 우민의 얼굴은 입술이 조금씩 움직일 때마다 뼈 위에서 가죽이 겉도는 것처럼 보였다. 피부 안에 있는 모든 지방질이 제거되어버려 마치 방글라데시의 기아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모세혈관이 드러나 있는 팔에서부터 손가락 끝까지 창백한 빛깔을 띠고 있었다. 옷 밖으로 드러난 피부 전체가 다 그런 빛깔이었다. 게다가 눈썹 부분과 역시 머리털이 있어야 할 모자 아래쪽의 뒤통수에서 목덜미까지 솜털만 있어 기이한 모양새였다. 나는 파도가 서너 차례 밀려오는 동안 멍하니 있다가 겨우 우민의 손을 잡았다.

"많이 아파 보이는데..."

유난히 차갑던 감촉이었다. 나도 우민의 손을 놓을 생각이 없었지만 우민도 내 손을 꽉 쥐고 있었다. 당시 느껴지던 그 손의 감촉을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돈 덕분에 여태껏 살고 있긴 하지만..."

우민은 허허롭게 웃었다. 말투에서나 모습에서 투병중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죽음을 앞에 둔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요즘엔 불치병이 거의 없는데..."

생명을 연장시킬 수 있을 만큼 의학은 발전을 거듭하고 있었지만 불치병이 없는 게 아니었다.  나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글쎄요... 저도 불가능이라는 단어가 싫긴 하죠."

좋지 않은 상황을 암시하는 말이었지만 마치 엉덩이에 붙은 먼지를 털어 내듯 말을 했다. 우민의 본래 스타일에서 상당히 벗어난 말투이기도 했다.   

그날 밤 나는 직원들과 회식 도중에 빠져 나와 우민을 다시 만났다. 포장마차로 가려다 소주 몇 병과 안주를 가까운 포장마차에서 배달시켰다. 우민과 함께 모래밭에 앉아서 술을 마셨다. 술을 권하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었지만 우민은 고집을 부렸다. 내가 소주를 두 병 정도 비우는 사이 우민은 반병 밖에 마시지 못했다. 소주를 마시면 속이 타는지 우민은 차가운 물을 벌컥벌컥 들이키곤 했다. 1리터들이 물병을 반쯤 비우면서부터 춥다는 말을 했다. 조금씩 몸을 떠는 우민의 몸에 내가 입었던 잠바를 벗어 덧입혀 주었다.

"골수암이라네요. 아시죠? 백혈병..."

잠바를 끌어안고서 떨리는 손으로 다시 소주잔을 들던 우민이 말했다. 우민은 위쪽 눈꺼풀이 아래로 축 쳐져 있었다. 나는 술 때문에 정신이 오락가락하고 혼란스러웠다. 얼굴을 돌려 게슴츠레한 눈으로 바다를 바라보았다. 바다와 그 위의 하늘이 출렁거리고, 수 겹의 파도가 마구 헝클어져서 밀려들고 있었다. 바람이 시려서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알지... 아까 보았을 때부터 짐작했어."

나는 한숨을 푹 쉬고는 소주를 연거푸 두 잔이나 마셨다. 손가락의 힘이 풀려 잔이 떨어질 것 같았다. 나는 때리듯이 쟁반 위에 술잔을 놓았다. 술을 마시는 도중 계속 마시던 물 탓이었는지 우민이 토악질을 했다. 몇 번 집어먹은 안주가 먼저 쏟아져 나오고 뒤이어 물이 딸려 나왔다. 맨 나중에는 침이 물엿처럼 입술 가장자리를 타고 흘러나왔다. 날씨가 후텁지근해서 나는 러닝셔츠만 입고 있어도 괜찮았지만 우민은 덫에 걸린 새처럼 파들파들 떨고 있었다. 우민이 다시 잔을 들었지만 취한 나는 제지하지 못했다.  

“죽을 때가 가까우니까 고향 바다가 너무 그리웠어요.”

메아리처럼 말이 울려 두 번 세 번 그 말이 거듭되는 것 같았다. 짐승은 산란을 하기 위해 태어난 곳을 다시 찾아들며 인간은 죽음을 목전에 두면 고향이 그립다던가. 

“저승은 내 고향 같은 곳일까요? 

나는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거렸다. 우민이 가까스로 들고 있는 소주잔에서 술이 넘쳐흘렀다. 금방이라도 쓰러져 모래 속에 얼굴을 파묻어 버릴 것만 같은 우민을 보면서 나는 말을 계속 지껄였지만 내 기억은 점점 흐릿해졌다. 

조금 추웠던지 햇살이 따스하다는 생각을 하며 일어났다. 우민은 내 허벅지를 베고 곤히 자고 있었다. 우리가 비워냈던 소주병은 네 개였다. 아침 해가 모래에 반쯤 파묻힌 소주병 주둥이에 머물고 있었다.

해변은 떼 지어 다니는 기러기와 과자 봉지와 술병으로 어지러웠다. 술병을 가운데 두고 밤을 밝히던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는지 모래사장에는 적막만 감돌았다. 어젯밤 술을 팔았던 포장마차는 마치 버리고 간 것처럼 텅 비어있었다.



그 후 두 달이 채 되지 않아 우민에 대한 비보를 전해들을 수 있었다. 우민의 아내에게서 그 소리를 듣자 내가 그를 저 세상으로 떠다민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날 함께 마신 소주가 그의 죽음에 일조를 한 것이 틀림없다는 생각이었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쿵쾅거리는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검은 양복으로 갈아입었다.

장례식장에 도착했을 때는 빈소가 썰렁해서 이웃과는 대조적이었다. 나는 연기가 피어오르는 향을 모래가 담긴 그릇에 꽂고 향 끝의 불티를 두 손가락으로 껐다. 연기 뒤쪽에서 흰 국화꽃에 파묻힌 우민이 웃고 있었다. 나와 첫 대면을 했을 때처럼 소년 같은 이미지였다.

열 살 먹은 아들이 상주였다. 서른 너덧쯤 되어 보이는 우민의 아내 서진은 목소리보다 더 연약한 모습이었다. 그들을 보자 내 자신에 대해 회의가 들었다. 우민을 만났을 때 도와주고 싶다는 생각을 미처 하지 못했다는 점 때문이었다. 나는 남에 대한 배려를 모르는 사람이었다. 생각해보니 남겨두고 가야할 아내와 아들에 대한 연민 때문에 우민이 술을 마시면서 몸부림쳤던 것 같았다.

어린 상주와 머리를 맞대고 절을 하는데 그런 저런 생각이 떠올라 곤혹스러웠다. 절을 끝낸 나는 아이의 얼굴을 차마 바라보지 못했다. 단출한 유족들 틈에 끼어 커다란 눈을 반쯤 뜨고 있는 서진은 혼이 나간 사람처럼 멍한 표정이었다. 생머리를 묶고 누리끼리한 무명저고리 치마를 입은 서진에게 겨우 위로의 말을 건네고 나는 도망치듯 식당 쪽으로 왔다. 밥을 먹을 생각이 없었지만 서진과 아들 보기가 민망해서 그런 행동을 취했던 것이다.

공동으로 사용하고 있는 식당이라 조문객이 많았다. 한쪽 귀퉁이에 있는 식탁 앞에 앉아있는데 음식이 나왔다. 나는 젓가락으로 밥알을 몇 톨 집어 입안에 밀어 넣었다. 밥을 씹는데 마치 모래가 섞인 것처럼 입안에서 서걱거렸다.

대리님에게만 이런 말씀을 드리는 거예요. 가지고 있는 돈은 치료비에 다 써 버렸거든요. 집도 벌써 임대 아파트로 옮겼구요. 마누라는 몸 밖에 남지 않는데 아들 녀석하고 어찌 살지 모르겠어요. 우민이 중얼거리던 말이 내 뇌리의 어느 구석에 박혀 있다 불쑥 떠오르는 것일까. 나는 육개장의 국물에 넣었던 숟갈을 도로 빼서 식탁에 놓았다.

일상으로 돌아오자 우민에 대한 생각은 점차 잊혀졌다. 생각해보면 우민의 죽음은 장례식장에서의 잠깐 겪었던 갈등일 뿐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그들이 아주 잊혀진 건 아니었다. 다만 내 일상에 그들이 끼어들면 복잡해 질 게 뻔했기 때문에 생각난다하더라도 애써 지웠다는 게 맞는 말일 것 같다. 하지만 우연히 나는 서진과 T마트에서 만나게 된다.

아내의 전화를 받았을 때 마침 내 차는 T 마트 앞쪽을 향해가고 있었다. 심부름으로 배를 한 상자 사야했기 때문에 나는 차를 도로가에 세웠고 그 마트의 문을 밀었다. 퇴근길과 맞물려서 마트 안은 사람 때문에 어수선했고 생선 냄새가 유난히 역겹게 느껴졌다. 생선 코너를 지나면서도 몇 걸음 떨어져 있는 과일 코너를 보느라 나는 시선을 멀리 두고 있었다. 그때 무엇인가가 내 옆머리를 잡아당기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얼굴을 그쪽으로 돌렸을 때 서진은 납작한 플라스틱 바구니에 담긴 꽁치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뒷머리를 느슨하게 묶어 짧은 옆 머리카락이 삐져나와서 흐트러져 있었다. 머리에 꽂힌 흰색 리본과 멍해 보이는 표정이 내 발목을 잡았다. 나는 서진을 한참 쳐다보았다.

서진이 미는 쇼핑카트가 내 앞을 지나면서 그녀의 시선이 내 얼굴을 쓰다듬듯 지나고 있었다. 반쯤 내려 뜬 서진의 눈과 내 눈이 잠깐 부딪쳤는데도 그녀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팔을 뻗어 수레를 잡자 서진은 나를 멀뚱히 쳐다보았다.

"저... 그때 뵈었는데...”

내 말에 서진의 눈이 조금 커졌을 뿐이었다.

“장례식장에서요...”

그렇게 말했을 때야 서진은 뻣뻣한 고개를 부드럽게 펴더니 끄덕거렸다. 굵은 실로 짜여진 흰 스웨터가 상복처럼 우중충한 빛깔을 띠고 있었다. 지나는 사람들이 힐끔거려 나는 명함을 주면서 도움이 필요하면 전화를 하라는 말을 하고 서진에게서 돌아섰다.

얼마 후 서진이 내게 전화를 한 것은 신원 보증인이 필요해서였다.

“이런 부탁을 하면 안 되는 줄 알지만...”

“어려워하지 말고 말씀을 해 보세요.”

서진이 너무 오래 침묵을 지키고 있어 나는 전화가 끊어진 줄 알았다.

“보증인이 필요한데...재산이 없는 사람은 안 된다네요. 다른 직장을 찾으면 되겠지만...”

흰 소복을 입은 가녀린 그녀가 떠올랐다. 우민이 없는 서진의 삶은 벌판에서 바람에 부대끼는 잡초나 마찬가지였다. 다른 직장을 찾겠다는 말 또한 답답한 소리였다. 나는 덜컥 해주마하고 약속을 해버렸다. 그 순간만은 자식에게도 보증을 서주면 안 된다는 불문율을 무시하고 싶었다. 설사 잘못된다 하더라도 도움을 주어야만 한다는 생각도 했다. 우민과의 약속이었으므로...

서류를 내미는 서진은 고개도 들지 못했다. 임서진이라는 이름 옆에 나란히 놓인 내 이름을 보자 마음이 떨렸다. 그때부터 천과 자수실의 관계처럼 내 인생이 서진과 서서히 엮여갔던 것이다. 아니 내 마음이 서서히 허물어져 갔다는 게 옳은 말일 것 같다.

그 당시 우리 부부는 별 문제가 없었다. 우리가 상류층에 편입할 수 있었던 이유는 부동산 계통으로 재테크 능력이 뛰어난 아내 때문이었다. 내 연봉이 오천만원 가까이 되지만 아이들에게 들어가는 사교육비와 수준에 맞는 생활을 하다보면 그다지 남을 것도 없었다. 아내 덕에 가장으로서 쫓기는 생활을 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었다.

우민을 만난 후 나는 삶의 불가항력에 대한 생각을 했다. 서진과 간혹 전화를 주고받으면서 임대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에 대해 부정적이 시각을 버렸다. 세상에 다양한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생각을 했다. 그 후 나는 생활고 때문에 일어나는 사건에도 나름대로 관심을 갖곤 했다.



내가 서진에게 그런 도움을 준지 다섯 달이 넘어가고 있었다. 간혹 서진이 짊어지고 있는 삶의 무게를 가늠해 보곤 했다. 유난히 눈동자가 커서 어딘가에 무연하게 시선을 던지고 있는 서진이 떠오르면 연민이 내 가슴을 치받곤 했다. 아내가 나를 냉정하게 대할 때면 서진은 털을 가진 작은 짐승처럼 따뜻할까하는 상상을 하기도 했다. 몇 번 전화는 했지만 거의 안부만 묻고 전화를 끊었던 것은 그런 갈등 때문이었다. 만난다는 것은 만남 이상의 행동을 전제할 수도 있었기 때문에 억제할 수밖에 없었다. 점점 가연성 물질이 되어가던 내게 불씨를 던진 사람은 아내였다. 그날 아침 잠옷 차림으로 소파에 앉아있던 아내는 건너편 임대 아파트에 대해 불쑥 말을 끄집어냈다.

“건너편 아파트는 안 헐리나? 싹 허물어 버리고 다시 지었으면 좋겠어.”

차분함과는 거리가 먼 억양 때문에 신경이 쓰였다. 나는 토스터에서 튀어나온 빵을 집으면서 눈을 크게 뜨고 아내를 쳐다보았다.

"그런 말이 돌아?"

아내는 대답을 하지 않고 오른쪽 다리를 왼쪽 무릎에 올려 두 다리를 꼬았다. 나는 거의 누운 듯 소파에 앉아있는 아내를 흘깃 쳐다보고는 버석거리는 빵을 베어 물었다. 밀가루 음식보다 밥이 나았지만 아침에 빵을 먹는 것은 신혼 때 내 스스로 만든 습관이었다. 빵을 먹을 때마다 울며 겨자 먹기라는 생각을 했지만 아내에게 말한 적은 없었다.

"쳐다보기에도 끔찍한 아파트야."

아내는 양쪽 팔을 구부려 팔짱을 끼면서 뱉어내듯 말했다. 나는 계속 빵을 우적우적 씹었다. 아직 해가 들지 않아 거실이 좀 어두웠다. 안경을 끼지 않은 상태라서 내 시야도 약간 흐릿했다. 아내의 표정이 확실하게 보이는 건 아니었지만 분위기가 냉랭하게 느껴졌다.      

그 아파트를 싹 허물면 서진은 어디로 가게 되는 걸까. 불현듯 그런 생각이 떠올랐다. 그때 얼핏 서진에게서 들은 말이 머리를 스쳤다. 그 임대 아파트는 지어진지 15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는 말이었다.

“십오 년 밖에 되지 않았는데 부수겠어? 건축법이 바뀌어서 이십오 년이 되어도 다시 짓지 않을지도 모르지. 또 리모델링이라는 것도 있잖아. 게다가 그 아파트는 유난히 튼튼하다는 것 같던데...”

“그렇대요? 난 몰랐네. 그럼 앞으로 더러운 꼴을 얼마나 봐야지? 십년도 아니고 십오 년? 아니 이십년? 아이 징그러워!”

내 쪽을 향해서 쏘듯 말하는 아내를 슬그머니 외면했다. 글쎄... 라고 얼버무리며 자리를 피하느라 식탁 의자에서 슬그머니 일어섰다.

드레스 룸에서 넥타이를 매는데 서진이 불쑥 떠올랐다. 한순간에 싹 헐어버려도 될만한 하찮은 아파트에서 그녀가 살고 있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아니, 오늘은 전화를 해서 어떻게 사는지 구체적으로 물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랜만입니다. 벌써 가을이네요.”

점심 식사를 하고 사무실로 들어오면서 나는 휴대폰에 대고 그렇게 말을 했다.

“예...말씀 안 하셨으면 아직도 여름인 줄 알았을 거예요.”

아주 가까운 사람에게서 전화를 받듯 자연스러운 말투였다. 휴대폰은 상대의 번호가 찍혀 누구인지 미리 알게 해 주는 게 장점이었다. 오늘은 차라도 마셔야겠어요. 가을이니까요. 내 말에 서진이 조그맣게 웃었다. 웃음소리에서도 애틋함이 느껴졌다. 가벼운 바람에도 꺼질 것 같은 촛불 같은 여자였다.

"저랑 차 마셔 주실 거죠?"

나로서는 용기가 필요한 말이었다. 목에 힘이 들어가서 큰 소리가 나왔다.

"제가 사드리겠다는 말씀을 미리 못 드려 죄송한 마음인 걸요. 멀리 오라 하셔도 나갈게요."

어조가 담담하고 부드러워서 내 마음을 훈훈하게 데워주고도 남음이 있었다. 나는 전화를 끊고서도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서진은 아내와는 너무 달랐다. 서진은 촌스러운데다 말이 없어서 순박해 보이는 여자였고, 아내는 품위를 위해서 말을 아끼는 편이었다. 물론 아내는 세련되어서 어디를 가든 돋보이는 여자였다. 아내의 재테크 능력은 생존경쟁이 치열한 사회에서는 필수적이라 할 수 있었다. 서진은 적은 봉급도 봉급이려니와 아들 때문에 재혼조차 꿈도 꾸지 못할 상황이었다. 말하자면 아내는 부익부요, 서진은 빈익빈이었다. 서진을 기다리는 동안 나는 아내와 서진에 대한 비교를 했다.

헐떡거리며 들어오는 서진은 수수한 회색 계통의 옷 때문에 얼굴에 생기가 더 없어 보였다. 궁색해 보인다는 표현이 딱 맞을 것 같은 차림이었지만 말간 얼굴과 까만 생머리가 잘 어울려 서른 중반의 나이에 비해 이십대처럼 청순해 보이는 이미지였다.

“기다리시게 해서 죄송해요.”

겨우 오 분 늦었으면서도 서진은 그렇게 말했다. 커피를 시키고 나자 어색한 느낌이 들었고 잠시 침묵이 흘렀다. 종업원이 금방 오지 않았다면 두 사람 다 시선을 처리하지 못해 쩔쩔 맸을 것 같았다. 쟁반에서 탁자로 옮겨진 커피 잔에서 부드러운 선율 같은 김이 올라오고 있었다. 나는 문득 양수리를 떠올렸다. 날씨가 흐린 날엔 저녁 무렵에도 강 위에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안개를 볼 수가 있었다. 마음이 답답할 때면 나는 팔당을 지나 양수리 쪽으로 돌아오곤 했다. 아침저녁으로 살갗이 까칠해지는 초가을부터 양수리는 늘 안개에 젖어있었다.

"조금 멀리 가도 되죠?”

그 말에 서진은 탁자를 가로로 문질렀다.

“멀리...어디요?”

“요즘엔 양수리에 안개가 낀답니다. 자 일어나시죠.”

커피를 마시자마자 나는 일어섰다.

“늦으면 안 되는데...아들이 기다리거든요.”

“아까는 당당하시더니...하하 걱정 마세요.”

“예...”

일어나면서 모기만한 소리로 대답을 하는 서진을 보며 나는 다시 웃어 보였다. 혼잡한 도심을 빠져 나오자 차에 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서진은 열림 버튼을 눌러 창을 조금 내렸다. 팔당대교를 지나면서부터 강을 끼고 달렸다. 해를 등지고 있는 산에는 벌써 어둠이 스며들고 있었다.

양수리에는 안개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운전대를 잡고 있으면서도 나는 강을 힐끔힐끔 쳐다보곤 했다. 강을 보자면 저절로 서진의 왼쪽 뺨에 내 시선이 닿을 수밖에 없었다. 서진은 마치 태어나서 처음 강을 보는 것처럼 넋이 빠져 보였다. 열린 창으로 바람이 새어들자 머리칼이 날려 서진의 갸름한 턱과 귀가 드러났다. 나는 서진의 귓불에 딱 달라붙은 귀걸이 같은 까만 점을 보았다. 얼굴보다 새하얀 귓불이라 점이 도드라져 보였다. 서진은 귓불이 유난히 도톰한 편이었다.

지루했는지 서진이 잠깐 몸을 뒤로 젖히고 눈을 감았다. 내 시선은 천천히 귓바퀴를 돌고 목을 지나고 있었다. 조금씩 내 코에 스며드는 어떤 냄새에 기분이 좋아지고 있었다. 햇살이 좋은 날 잘 마른빨래에서 나는 냄새와 같았다. 가을바람에 말라 가는 풀 냄새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몸을 오른편으로 기울일수록 진하게 나는 냄새였다.

내 중추 신경이 흐트러지고 있었다. 무딘 감각기관이 날을 세우면서 진땀이 나고 시야까지 침침해지는 것 같았다. 가끔 허벅지가 불편해서 나는 바지의 밑을 재빨리 당기곤 했다. 잠시 후 갓길이 좁았지만 브레이크를 밟았다. 앞 범퍼가 추락 방지를 위한 시멘트 구조물에 부딪는 소리를 냈다. 눈을 감고 있던 서진은 눈을 뜨고 나를 쳐다보았다. 서진의 눈동자가 호기심 많은 아이처럼 커다랗게 열렸다.

“대단한 안개죠?”

나는 서진을 쳐다보며 크게 말했다.

“안개를 보려면 얼른 나가셔야죠.”

내 말에 서진이 차 문을 열었다.

나는 긴장을 풀기 위해 서진과 거리를 두고 섰다. 강 표면에서 수증기처럼 뽀얀 안개가 일어나고 있었다. 잠시 구름이 되어 사라지는 아침 안개와는 달리 해가 지면서 김처럼 모락모락 일어나는 안개는 허공만 맴돌다 사라지곤 했다.

발걸음을 옮기면서 내게 옆모습을 보이고 있는 서진을 슬쩍 훔쳐봤다. 강을 응시하는 서진의 턱이 조금 들려져 있었고 둥그렇던 눈의 얇은 꺼풀이 자연스럽게 내려와서 무연한 표정으로 바뀌어 있었다. 차가 지나면서 일으켜지는 바람과 빵빵거리는 소음 때문에 간혹 서진의 얼굴이 찌푸려지기도 했다.

"저쪽 산에는 어둠이 깔렸네요.”

해가 넘어간 서쪽 산을 쳐다보면서 서진이 하는 말이었다.

“어둠이야 해를 등지고 앉은 산으로부터 오지요. 자... 가죠. 어둡기 전에 돌아갈 수는 없겠지만...”

서진이 나를 쳐다보며 웃었다.

차에 올라서 쳐다보니 서진의 눈 꼬리와 입 가장자리에 머물던 웃음기가 사라져 있었다. 이삼 분이 채 안되어 다시 차를 댄 곳은 레스토랑 앞이었다. 정원이 운치가 있어 눈에 확 띄는 곳이었다. 정원수인 소나무 몇 그루는 고목의 형태였는데 거기에는 꼬마전구가 무수히 매달려 있었다. 아직 네온을 켜기엔 이른 시간이었지만 꼬마전구에는 불이 들어와 있었다. 레스토랑으로 가기 위해서는 화단을 지나야했다.

무릎 높이쯤에 곡선형으로 만들어져 있는 화단 중간에는 분수대가 있었다. 분수대 앞에서 흰 석고로 만든 사내아이가 오줌을 싸고 있었다. 사내아이의 오줌의 일부는 화단의 이끼 속으로 스며들게 되어 있었다. 손가락 한마디 정도 되는 사내아이의 성기는 사람들의 손때가 묻어 새까만 빛깔이었다.

레스토랑에 들어가서 나는 강을 등지고 앉았다. 서진의 시선은 내 어깨를 넘어 강에 머물러 있는 듯 했다. 나는 레스토랑의 열린 뒷문을 통해 바깥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레스토랑과 마당을 사이에 두고 사오 층 정도 되는 건물이 있었다. 뒤쪽 건물이 모텔이라는 것을 금방 알았던 이유는 간판을 보아서가 아니라 주차되어있는 빨간색 비닐 천 때문이었다. 그 천은 중간부분부터 아래쪽까지 가위질이 되어 있었지만 일렬로 늘어 서있는 차의 번호판은 감쪽같이 덮고 있었다.

초저녁인데 많은 사람들이 들락거렸다. 그쪽에서 나가는 길이 있을 텐데도 사람들은 레스토랑을 거쳐서 나갔다. 더러는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했지만 일부는 그냥 나갔다. 그들이 레스토랑에 함께 들어오는 경우는 드물었다. 한 사람이 들어오면 뒤쪽 사람은 몇 분 후에 들어왔다. 식사를 하지 않고 나가는 남녀는 누가 누구의 파트너인지 구분하기도 힘들었다. 주문한 음식이 나오기 전까지 나는 그쪽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식사를 하면서도 간혹 그곳을 쳐다보곤 했다. 달리 말하자면 그 시간 내내 나는 잡념에 시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아직 덜 마른 머리칼을 만지면서 뒷문을 들어서는 상기된 여자들의 얼굴을 볼 때마다 맥박이 조금씩 높아지는 것 같았다.

“뭘 그렇게 보세요?”

서진이 식사를 하다말고 돌아보았다. 이내 붉어지는 서진의 표정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오해받기 딱 알맞은 상황이었다.

“뒤쪽에 뭐가 있는지 보지 못해서...”

말끝을 흐리면서 서진의 표정을 살폈다. 서진의 볼은 선명하다 할 정도로 붉어져 있었다. 서진은 시선을 내리깔고 입안에 있던 음식을 천천히 우물거렸다. 마치 스티로폼처럼 잘 씹히지 않은 걸 입안에 담고 있는 것 같았다. 서진의 양쪽 입가에 바늘귀만한 보조개가 잠깐 생겼다 사라지곤 했다.

어색한 분위기였지만 본능만을 감지하는 내 성기는 주인에게 충실하겠다는 듯 껄떡대고 있었다. 그 끝에 온 신경이 쏠려 몸이 조금씩 굳어져 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진땀 때문에 머릿속이 스멀거렸다. 거미가 꽁무니에서 줄을 빼면서 온 머릿속을 헤집고 다니는 것 같았다. 나는 쥐고 있던 포크를 떨어뜨렸다. 냅킨으로 입술을 닦던 서진이 나를 쳐다보았다.

“오늘 잘 먹었습니다. 다음에는 제가 식사 대접을 할게요.”

진퇴양난이라 할 수 있는 내 상황을 마치 알고 있는 것처럼 서진이 얼른 그 말을 했다. 입술은 열리지 않고 머릿속은 얽혀버려 화장실에라도 다녀올까 하던 참이었다. 서진의 말에 내 머리를 얽고 있는 거미줄이 전부 걷히는 것 같았다.

“하하... 별말씀을...”

밥을 거의 먹었기 때문에 나는 웃으면서 집어 올린 포크를 접시위에 놓았다. 서진이 핸드백에서 꺼낸 거울을 보고 있는 틈을 타 일어섰다.

“이제 일어서죠.”

“네...”

“아휴 이제 긴장이 좀 풀리네요. 하하하...”

내가 웃음을 터트리자 서진도 멋쩍은지 픽 웃었다. 문을 열고 나오는데 시원한 바람이 가슴을 쓸고 지나갔다.



새벽에 내린 된서리에 플라타너스의 잎이 오그라들어 있었다. 마치 삶아버린 것처럼 새파란 빛깔로 얼은 상태였다. 며칠이 지나면 한꺼번에 우수수 떨어질 것이고, 발길에 점점 가루가 되어갈 거라는 생각을 하면서 손을 비볐다. 차에 올라앉아 시계를 쳐다보고는 시동을 켠 채 잠시 앉아 있었다. 문자 메시지가 도착했는지 주머니에서 삐삐 소리가 났다. 휴대폰을 들여다보니 받은 메시지는 딱 한 문장이었다.

‘오늘 좀 뵙고 싶군요.’

오늘? 나는 잠시 의아하다는 생각을 하다 아아...라고 토해내듯 혼잣말을 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저녁대접이라는 서진의 말이 어렴풋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간혹 통화를 하면 안부 말 외에는 하지 못했다. 토요일이지만 격주로 근무를 하기 때문에 일찍 끝나지 않는 날이었다. 핑계를 대고 일찍 퇴근을 할 수 있다는 말을 하자 서진은 끝나는 시간에 맞추겠다는 말을 했다.

집에서 식사를 하자는 약속 때문에 온종일 정신 집중이 되지 않았다. 건성으로 일을 마무리하고 조금 일찍 퇴근을 했다.

전화도 하지 않고 일부러 집으로 왔지만 아내는 집에 없었다. 차라리 다행이었다. 아이들도 어차피 집에 없어 가벼운 차림으로 옷을 갈아입고서 거실에서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다. 모임에 참석중이라는 아내는 다소 들뜬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주변의 소음에다 아내의 목소리가 간헐적으로 끊기곤 해서 나는 소리를 높였다.

“초상집에 가야 하는데...”

“그럼 늦겠네. 밤을 새야하는 것 아냐?”

아 아냐... 눈치 봐서 일찍 오지 뭐. 침착하려고 했지만 말이 좀 떨렸다. 알아서해. 라고 하면서 아내는 내 대답도 듣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아내의 그런 상황에 나는 안도를 하고 집을 나섰다.

일부러 택시를 타고 빙 돌아서 임대아파트 단지의 근처에서 내렸다. 누구의 눈에 뜨이더라도 오해의 소지가 없도록 하기 위해 택한 게 주택가의 비좁은 길이었다. 골목의 쓰레기 봉지 옆에 절반쯤 탄 연탄재가 뒹굴고 있었다. 골목에서 연탄배달을 하는 노부부와 마주쳤다. 워낙 비좁은 골목이라 나는 뒤로 몇 걸음 물러나 길이 조금 넓은 곳에서 부부가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아파트 단지의 철망을 따라가니 입구가 나왔다. 철망을 오려서 작은 문을 만든 것 같았는데 늘 열어두는 모양이었다. 서진이 설명해준 그 길은 정문도 후문도 아닌 애매한 문이었다. 처음에는 개구멍처럼 뚫어 사람들이 들락거리다 차라리 문으로 만들어 버린 것 같았다. 그쪽으로는 경비실은 없었고 아파트 앞 주차장에서 인라인 스케이트를 타는 애들만 많았다. 차와 아이들이 함께 움직이고 있어서 불안한 풍경이었다. 나는 아파트 측면에 쓰인 숫자를 쳐다보면서 입구를 찾아 안으로 들어갔다.

비상계단으로 갈까 해서 그쪽을 들여다봤는데 무척 어두웠고 비릿한 냄새와 퀴퀴한 냄새가 섞여 났다. 엘리베이터 앞은 바깥과는 달리 어두웠다. 스위치를 찾다보니 어지럽게 그어진 낙서만 눈에 뜨였다. 스위치가 없는 걸로 봐서는 경비실이나 관리실에서 불을 켜야 하는 것 같았다. 두리번거리다 껌을 짝짝 씹으며 개를 안고 있는 여자 뒤에 엉거주춤 섰다. 여자의 얼굴은 파운데이션이 너무 짙게 발라져 마치 살색 페인트를 칠한 것 같았다. 인조 속눈썹 때문에 눈이 오히려 우스꽝스러웠다. 여자가 안고 있는 개가 내 쪽을 향해 목을 뻗으면서 코를 씰룩대곤 했다. 리본으로 털을 매었는데도 눈이 가려져 있어 답답해 보였다.

신발 바닥이 감촉이 좋지 않아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바닥에 누런 물이 흥건해서 나는 한 걸음 물러났다. 여자의 싸구려 향수냄새에 잠시 가려졌던 지린내가 순식간에 폐까지 들어오는 것 같아 속이 울렁거렸다. 흔히 있는 일인지 여자의 표정은 그대로였다. 8층에서 멈추자 여자가 엘리베이터에서 나가 버둥거리는 개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몇 초 후 엘리베이터는 10층에서 다시 멎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나오자 나는 숨을 몰아쉬었다.

열대여섯 집이 함께 쓰고 있는 긴 복도에서도 세발자전거를 탄 꼬마 애들 둘이서 소리를 지르며 놀고 있었다. 맨 첫 집인 그 집의 문을 두들기면서 문이 조금 열려있는 것을 보았다. 서진이 금방 문을 밀었고 나는 스며들듯 그 집으로 들어갔다.

벽에 붙어있는 좁은 식탁에 몇 가지 음식이 차려져 있었다. 앞치마를 두르고 있는 서진의 손이 빨갰다. 살림이 거의 없었어도 거실이 비좁아 매우 답답했다. 택시에서 내린 후부터 계속되는 답답함이었다. 시선을 돌리자 베란다 쪽으로 주택가가 펼쳐져 있고 그 뒤에 산이 있어 그제야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화분 몇 개가 베란다에 놓여 있었다.

“앞이 트여서 좋으네요.”

내가 그렇게 말하자 서진은 입을 가리면서 작은 소리로 웃었다.

“하지만 사장님 댁에 비하면 새장 같을 거예요.”

새장? 새장보다는 닭장이 한결 어울리겠지만 자신이 살고 있는 집을 그렇게 표현할 사람이 있을까. 나는 집안을 둘러보았다.

“아들은 안 보이네요?”

나는 방문이 조금 열려있는 안방 쪽으로 시선을 멈추고 물었다.

“지 할머니 댁에 갔어요. 토요일만 되면 안달을 하거든요.”

토요일이면 늘 혼자 지내다는 말을 우회적으로 표현하는 것 같았다.

“시어른께서 며느님이 도망 갈까봐 걱정하시는 모양입니다.”

“아...아니에요. 어머니는 그런 분이 아니고요. 저도 그런 처지가 아닌걸요.”

내 의도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 같긴 했지만 듣기는 불편했던 모양이었다. 서진은 냉장고 쪽으로 돌아서더니 플라스틱 통에 담긴 보리차를 내왔다.

“저녁을 꼭 대접해 드리고 싶었어요. 제가 해 드린 게 없어서...”

서진은 다시금 얼굴을 붉혔다. 얼굴에 화색이 돌면 생기가 있어 보였다. 나는 시선을 둘 곳이 없어 모아 쥐고 있는 내 손만 바라보았다. 의자에 앉으려던 서진이 일어서더니 안방으로 들어갔다. 나오는 서진의 손에 쥐어진 것은 목이 길고 아래쪽으로 항아리처럼 부풀은 술병이었다. 술에 약한 나는 알코올도수가 40%인 홍주 첫잔을 덥석 마셔버렸다. 목구멍에 찌르르 전기가 지나가는 것 같았다. 금방 얼굴이 홧홧 거렸다.

“아구찜이 맛있네요. 손수 만드신 거죠?”

“하지만 솜씨가 친정어머니만은 못해요.”

“아뇨. 잘 하시는데요.”

어색한 분위기 때문에 나는 일부러 말을 많이 했다. 서진은 얼굴도 쳐들지 못하고 조그만 소리로 대답을 하곤 했다. 서진이 잠깐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는가 싶더니 다시 일어났다. 서진의 얼굴은 술을 마신 것처럼 양쪽 볼이 달아 있었다. 나는 연거푸 한잔을 더 마셨다. 잔을 비운 나는 한잔을 더 따라서 의자에 앉기 위해 엉거주춤하게 서 있는 서진에게 잔을 내밀었다.

“한잔만 하세요.”

서진이 나를 쳐다보더니 두 손으로 받았다. 서진은 반잔을 마시고 잔을 내려놓았다.

“저는 술을 거의 마시지 못한답니다. 더 마시면 호흡곤란이 올 거예요.”

“아... 몰랐습니다. 오늘 고맙습니다. 초대해 주셔서요...”

“아녜요.”

서진은 탁자에 올려진 두 팔을 내리더니 고개를 숙였다. 얼굴로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말끄러미 바라보다 나는 일어섰다. 무릎이 꺾일 것 같아 의자의 등받이를 잡았다.

“화장실 좀...”

비틀거리며 서진을 쳐다보았다. 서진이 얼굴을 들더니 손가락으로 오른 쪽을 가리켰다. 탁자 위의 불빛이 서진의 옷과 피부 빛깔까지 화사하게 바꾸어 놓고 있었다. 나는 서진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잉크가 종이에 번지듯 볼의 붉은 반점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 마치 눈물이라도 고인 것처럼 서진의 눈동자가 일렁이는가싶더니 나를 외면했다. 나는 떨리는 서진의 눈꺼풀을 바라보다 화장실로 몸을 돌렸다. 화장실까지는 딱 세 걸음이었다.

참았기 때문에 오랫동안 뿜어져 나오는 오줌줄기를 보면서 벽에 손을 짚었다. 주방과 화장실이 너무 가까워 크게 들릴 것 같았다. 소리를 죽이려고 힘을 주자 성기가 딱딱해졌다. 귀두를 쳐들고 있는 성기 때문에 자크가 말을 듣지 않았다. 겨우 올렸는데 중간 부분이 불쑥 튀어 나와 보였다. 세면대에서 손을 씻으며 바지를 몇 번 내려다보았지만 계속 그대로였다. 거울을 쳐다보았다. 차 오른 욕구 때문에 눈언저리만 빨간빛을 띠고 있었다. 이젠 어쩔 수 없었다.

서진을 만나는 것은 우민과의 약속을 지키는 일이었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물론 우려는 했었지만 나는 절제를 할 수 있을 거라 믿었었다. 결혼생활 내내 나는 그 흔한 외도조차 한 적이 없었다. 아내와 갈등을 그런 식으로 해결하는 남자들이 내겐 오히려 이상해 보였다.

아내와 섹스 트러블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나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었다. 아내는 피곤하다며 내 가슴을 밀어 낸 적이 많았다. 세련된 외모와는 달리 섹스에 워낙 둔한 여자였기 때문에 성적으로 불만은 꽤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외도라는 건 내 스스로를 허접하고 구차하게 만드는 행위일 뿐이었다.

무감각했던 아내와의 섹스를 떠올리자 욕망이 점점 거세어지는 것 같았다. 출구를 찾고 있는 수억 마리의 정충이 눈앞에서 어른대고 있었다. 바지춤을 만지던 나는 머금었던 물로 입안을 헹구어 낸 후 거실로 나왔다. 서진은 싱크대 앞에 서서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

뒤쪽에서 서진의 몸을 감싸 안았다. 서진이 내 손을 잡아 풀더니 벽의 스위치를 내렸다. 초저녁이라 어슴푸레한 기운이 안으로 비쳐들어 별로 어둡지 않았다. 서진의 티셔츠를 뒤집어 벗겼다. 브래지어를 밀어 올리자 흰 국화송이처럼 탐스런 젖가슴이 튕겨 나왔다. 가는 목이나 가는 팔과는 대조적인 가슴이었다. 마치 무덤처럼 동그란 젖가슴이었다.

젖꼭지가 알사탕처럼 입안으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나는 발가락으로 서진의 고무줄 치마와 팬티를 밀어 내렸다. 서진의 속살은 적당한 습기를 머금고 있는 것 같았다. 음모에서는 이끼 냄새가 났다. 음모 안의 젖은 속살에 내 손가락이 닿았을 때 서진이 입을 벌렸다. 나는 혀로 서진의 혀를 휘감았다.

서진과 나는 아주 오래된 연인처럼 섹스의 호흡이 잘 맞았다. 서진과의 섹스는 그네뛰기를 하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서 있는 내 양다리 사이에 서진이 앉아 있었다. 솟구친 그네가 뒤로 밀려날 때면 서진은 진저리를 치곤했다. 다리를 통해 서진의 진저리가 감지되면서 내 몸의 전류는 점점 배가되었다. 섹스를 하는 내내 나는 아내를 사랑한다고 믿었던 것이 거짓말이라는 생각을 했다.

누군가가 문을 두들긴다는 말을 서진이 했을 때 나는 환각에서 깨어나기 전이었기 때문에 잘 알아듣지 못했다. 서진이 내 가슴을 밀어낼 때야 나는 누가 밖에 왔다는 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었다. 나는 서진에게 불을 켜지 말라는 말을 했고 서진은 밖에다 대고 누구냐고 물었다. 겉옷만 걸친 서진은 현관 쪽으로 가서 내 신발을 재빨리 신발장에 넣었다.

경비원이 낮에 받았던 등기우편물을 가져왔다는 말을 하면서 서진이 내 쪽으로 얼굴을 돌리고 웃어 보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내 옷과 서진의 속옷을 들고서 안방으로 들어갔다. 침대에 누워 꿈틀대는 성기를 슬쩍 만져보았다. 한번으로는 아쉽다는 느낌이었다. 서진이 원한다면 몇 번이라도 더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조금 열린 창으로 아직 부연 하늘이 보이고 별 몇 개와 초승달이 보였다. 몸의 열기가 식지 않아 나는 이불도 덮지 않은 채 턱을 쳐들고 흔적도 없이 사라질 가느다란 달을 쳐다보았다.

현관 쪽에서는 말이 길어지고 있었다. 어수선한 느낌이 들어 나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때 서진의 비명이 났다.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는 것 같아 속옷을 입을 새도 없었다. 나는 옆에 놓여있는 옷을 뭉뚱그려들고 창을 통해 베란다로 나갔다. 베란다에는 커다란 항아리가 놓여있었다.

서진의 속옷과 내 옷을 말아 안은 채 나는 항아리 밖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서진의 공포에 질린 목소리와 어떤 남자의 고함 소리 그리고 아내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들은 낚시 바늘처럼 항아리 안을 맴돌면서 나를 낚아채려 하고 있었다. 잠깐 사이 물 사마귀 같은 소름이 내 온몸을 뒤덮었다. 웅크린 나는 침을 목구멍 안으로 밀어 넣어 가면서 숨을 죽이고 있었다.

베란다 문이 밀리는 소리가 나면서부터 사람들이 내는 소리가 딱 멎었다. 그건 또 다른 시작의 의미였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덫에 걸린 비둘기처럼 내 몸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반사작용으로 턱까지 움직이기 시작하자 나는 손으로 턱을 움켜잡았다. 이어 발자국 소리가 내 귀를 울렸다. 바닥의 타일과 신발 뒤축이 탁탁 부딪는 소리였다. 발소리가 딱 멎자 적막이 감돌았다. 순간 내 심장도 박동을 멈추었다.

그와 동시에 항아리 뚜껑이 열리고 불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저절로 내 시선이 위쪽으로 향하면서 눈동자 네 개와 마주쳤다. 짧은 시간 네 개의 눈동자는 벌거벗은 내 몸을 훑었고, 조금 전까지 바깥세상으로 촉수를 내밀고 있던 내 성기는 번데기보다 더 작은 모양으로 오그라들었다. 고환까지도 속살을 비집고 들어갔다. 나는 그것이 다시는 제 기능을 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예감하고 있었다.

베란다의 항아리는 나를 통째로 삼켜버린 늪이었다. 그 후 나는 단 한번도 아내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다. 항아리에서 꺼내진 후부터 내 성기는 스스로 거세되어 버렸다.



아내는 고맙게도 절에서 가져온 커다란 달력을 내 방에 걸어 두었다. 날짜는 양력과 음력이 함께 간다. 달력을 쳐다보니 우연하게도 오늘이 초사흘이다. 나는 서쪽의 열린 창으로  고개를 돌린다. 작은 공간에 그림처럼 달이 떠있다. 사건이 나던 그날도 오늘처럼 머리카락만큼 가는 달이 잠깐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초승달이 서쪽하늘에 머물 때면 나는 시간이 정지되어있는 듯한 착각에 빠지면서 죽음보다 깊은 고통에 빠진다. 달이 지고 어둠이 밀려오면 그때서야 나는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 가슴을 뚫고 나오겠다는 듯이 심장이 벌떡대던 그날 밤이 떠오른다. 그날 나는 자동 기계처럼 딱딱 마주치려는 이를 앙 다물고 웅크리고 있느라 얼마나 힘들었던가. 두근거리는 심장의 박동을 느끼며 한참 달을 쳐다보던 나는 눈을 감는다.

나는 알몸인 채로 서진의 속옷을 안고 있다. 그 속옷은 이내 눈을 둥그렇게 뜬 서진으로 바뀐다. 서진의 몸은 너무 가볍다. 그때 안방에서 아내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약 기운에 벽에 기댄 채 깜빡 잠들었던 나는 돌덩이가 매달린 것 같은 눈꺼풀을 억지로 밀어 올린다.

"항아리 속에서 벌고 벗고 있는 사람을 본적이 있니? 얼마나 끔찍한데...뜨거운 물에 튀겨낸 돼지를 면도칼로 밀었을 때를 상상해봐. 그거? 하하하...쓸모없어. 내 검지 크기인데, 뭐. 애초에도 작았지만 지금은 반 토막이야. 애들 고추 수준만도 못해."

아내는 목욕을 시킨다면서 내 성기를 주무르곤 했다. 지저분하다고 성기의 표피를 뒤집을 때면 얼굴빛이 노래지곤 했지만 소리를 지를 수도 없었다. 아내가 따귀를 갈기거나 머리를 잡고 물에 처박는 일도 무서웠다.

"그 알량한 걸 가지고 바람을 피운다고...미친놈... 하긴 임대아파트 수준에는 딱 맞겠지."

아내와 통화를 하는 사람이 여자인 것 같았지만 누군지 알 수는 없다. 겉모습만 보았던 아내의 친구들의 내면을 어찌 알까 싶다. 항아리 안에서 듣는 것처럼 아내의 웃음소리가 내 귀청을 왕왕 울린다. 수화기만 들면 그런 말을 하기 때문에 나는 귀를 막으려고 축 늘어져 있는 팔을 올리는 자세를 취한다.

경찰관이라 밤낮이 없지 뭐. 아내의 수다는 경찰관들이 하는 일로 옮겨간다. 그들이 하는 일을 아내는 너무 잘 알고 있다. 나를 항아리에서 끄집어내던 젊은 경찰관이 떠오른다. 몸에 군살이 없고 얼굴의 절반 정도가 수염 때문에 파르스름하던 남자였다. 넥타이를 매지 않아 남방 틈에서 구불거리는 털이 솟아 나와 있었다. 사랑과 웃음은 감출 수가 없다던가? 생각해 보니 나는 어설픈 새였고 아내는 덫을 놓는 사냥꾼이었다.


                                             

                                           -끝-









김은숙   2006-0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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