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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금 공원에서는


 

 

 

 

 

 

 

 

   년 전만해도, 공원은 소나무가 듬성듬성 서 있고 사이사이에 아카시아가 엉켜있던 야산이었다. 산자락에는 묘 몇 기가 엎드려 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오전 아홉 시. 흰 와이셔츠의 남자는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린 채 공원 의자에 앉아있다. 남자의 얼굴이나 손등은 새카맣다. 거의 한 시간 가까이 꼼짝 않고 의자에 앉아있던 남자는 천천히 일어선다. 남자도 몇몇 사람들처럼 시계바늘이 움직이는 방향으로 걷기 시작한다.

잔디밭에는 아이들이 삼삼오오 모여 앉아있다. 초등학교 일이 학년쯤 되어 보이는 아이들의 조그마한 손에는 크레용이 쥐어져 있고 무릎 앞에는 스케치북이 놓여있다. 아이들은 공원의 울타리를 이루고 있는 자잘한 나무를 그린다거나, 잔디밭과 굵은 둥치의 나무를 그리기도 한다. 옆에 앉은 아이의 그림을 슬쩍 모방하는 경우도 있다.

조잘대는 아이들이 있어서 공원이 밝게 느껴진다. 안경을 낀 아이들이 사 분의 일쯤은 되는 것 같다. 아이들의 얼굴은 연 초록빛에서 진 초록빛으로 바뀌는 나뭇잎처럼 싱그러워 보인다.

잠깐 멈춰선 남자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미소를 짓는다. 남자에게도 아들이 있다. 이 시간이면 아들은 학교에 있을 것이다. 입술을 콱 깨무는 남자의 시야는 뿌옇게 흐려진다. 눈을 깜빡이던 남자가 걷기 위해 몸을 돌리는 순간 한 노인이 시야를 가로 막는다. 지팡이를 짚은 노인은 굼뜬 동작으로 남자를 비껴서 의자를 향해 걸어간다. 노인이 의자에 앉을 때까지 남자는 지켜보고 있다.

비썩 마르고 눈이 쑥 들어간 노인의 피부는 아이들과는 대조적이다. 노인의 몸은 마치 오래된 흙 조각처럼 만지면 바스러져 버릴 것만 같다. 눈동자의 수정체는 여러 가지 물감이 뒤섞인 것처럼 탁하다. 노인은 무심한 표정으로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다. 햇살이 노인의 등 뒤에 있기 때문에 얼굴이 거무스름해 보인다. 그르렁대는 숨소리 때문에 남자는 불안해진다.

남자가 걸음을 재촉하기 위해 몸을 돌리는 순간 빨간 빛깔이 남자를 휙 지나친다. 빨간티셔츠를 입은 여자다. 지팡이를 피해서 달리는 털빛이 하얀 강아지 때문에 여자가 잡고 있는 줄은 팽팽해져 있다.

여자와 강아지가 사라지자 남자는 노인을 흘깃 쳐다보면서 80년 정도의 세월을 살았을 거라는 짐작을 한다. 남자는 노인에 비해 반 정도밖에 살지 않았지만 세월이 허무하게 느껴진다. 남자의 다리에서 힘이 쭉 빠진다. 어깨를 축 늘어뜨린 남자가 의자를 찾아 앉는다. 등을 기대려는데 귀에 익숙지 않은 소리가 들린다. 쥐가 나무를 갉아대는 것처럼 귀를 자극하는 소리이다.

소리가 미치지 않는 곳으로 가기위해 의자에서 일어서지만 호기심 때문에 남자의 시선은 근처의 플라타너스 위로 옮겨간다. 눈을 파고드는 해를 가리기위해 남자는 손을 이마에 둥글게 오그려 붙인다. 모자를 눌러쓴 구릿빛 피부의 사내가 톱으로 가지치기를 하고 있다. 나무 아래쪽에서는 안경을 낀 사내가 잔가지를 모으는 중이다. 차곡차곡 쌓인 가지는 베어낸 자리에 물방울이 송알송알 맺혀 있다. 그쪽으로 그늘이 드리워져있어 물방울은 검붉어 보인다. 남자는 톱질 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들이 일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일에 열중하는 사이 강아지가 나뭇단 곁으로 와서 냄새를 맡는다. 강아지가 한쪽 뒷다리를 쳐들자 안경 낀 사내가 손을 휘휘 젓는다. 강아지는 빨간티셔츠를 앞세우고 가버린다.

남자가 시선을 옮기면서 세어보니 잘라버린 나무가 열 그루도 넘는다. 잘린 나무들은 손가락이 떨어져나간 손처럼 뭉툭하면서 흉측스럽다. 여름이면 방제를 해야 할 정도로 벌레가 들끓는 나무이긴 하나, 이런저런 핑계로 가지를 잘라낼 거라면 아예 심지 않는 게 바람직하다는 생각이 든다.

“나, 실은 어제 회사에서 잘렸어.”

얼굴을 찌푸리고 있던 남자는 볼멘소리를 따라 시선을 옮긴다. 대각선 건너편의 의자에 검정양복을 입은 사람이 등을 기대고 앉아있다.

“형님은 인정받고 있었잖아요?”

곁에 앉은 남색조끼의 남자가 격한 어조로 말한다.

“내가 일을 좀 까다롭게 처리하잖아? 회사를 위해서였는데 오히려 그게 빌미가 된 것 같아. 나 같은 사람은 다루기가 힘들 테니까.”

검정양복의 억양으로 봐서는 뒷말을 겨우 마무리하는 것 같다. 남자는 시무룩한 검정양복을 바라보다가 자기도 모르게 혀를 찬다.

“그렇게 막 잘라내다가는 회사 문 닫겠네요. 그럼 이제 형님도 시골로 내려가실 거예요?”

남색조끼는 말을 하면서 가지가 잘려나간 플라타너스를 바라본다.

“글쎄...”

한숨을 쉬던 검정양복은 말조차 제대로 잇지 못한다. 아직 초여름이지만 그 사람은 땀을 줄줄 흘리고 있다. 남자는 검정양복의 주름진 턱을 보면서 고개를 젓는다. 농사일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남자는 자신의 몸을 훑어본다. 약간 작은 키지만 단단하고 벌어진 가슴을 가졌으며 무엇보다 아버지를 따라서 농사일을 해본 경험이 있다. 아버지는 이제 나이가 많아서 농사일이 벅차다고 하지 않던가. 그러나 장애물도 있다. 아내는 시골생활이 무조건 싫다고 했다. 모기가 많아서 싫고 온종일 땡볕아래서 일하는 것은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다고 했다.

공원에 나오기 전 남자는 아내에게 말을 다시 끄집어냈다.

“가고 싶으면 당신이나 가라니까. 나는 죽인다 해도 그런 일은 못해.”

딱 잘라 말하는 아내를 바라보며 남자는 숨을 몰아쉬었다. 이번만큼은 남자도 뒤로 물러서고 싶지 않았다.

“어디, 너 혼자 잘 살아봐.”

“나도 그 동안 지긋지긋했는데 잘 되었네.”

아내는 코웃음을 쳤다. 10여 가지 고급 화장품으로 세련되게 꾸민 얼굴과 에나멜을 바른 손톱이 떠오른다. 십여 년 동안 에나멜 부스러기를 양념 삼아서 밥을 먹은 것 같아 남자는 속이 메슥거려진다. 그런 여자를 좋아해서 오 년씩이나 따라다녔다는 생각을 하니 실소가 터진다.

얼굴을 찡그린 채 헛웃음을 치던 남자는 등을 구부린 자세로 얼굴을 감싸 쥔다. 몇 걸음을 움직이다 다리에 힘이 빠져 아무데고 주저앉는다. 땅이 꺼지라고 한숨을 쉬던 남자는 기계충이 먹어버린 머리처럼 군데군데 황토 흙이 드러나 있는 잔디밭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수많은 발길질을 이겨낸 잔디는 유월의 햇살아래 윤기가 흐른다. 하늘을 보니 해가 제법 올라와있다.

긴장 탓인지 뒷덜미가 후끈거려서 남자는 그늘을 찾는다. 바로 앞에 둥치의 둘레가 일 미터는 됨직한 버드나무가 하나 서 있다. 아쉽게도 그곳은 삼십대 중반에서 사십대 초반쯤 되어 보이는 여자들에게 점령당한 상태이다. 그곳에서는 시답잖은 말이 오가고 가끔씩 폭소도 터진다. 여자들 대부분이 편한 포즈를 취하고 있어 남자의 눈에는 한가한 풍경으로 비친다. 그때 갑자기 샛노란 멜빵치마를 입은 아이가 뛰어들어 얘기의 흐름을 막는다.

“무슨 일이니?”

단발머리의 여자가 쭈뼛거리는 아이를 보면서 상냥하게 묻는다.

“선생님, 쟤가 방해를 해요.”

여자아이가 가리키는 사내아이의 얼굴에 구정물 얼룩이 져있다. 히죽거리고 있는 사내아이는 윗니 두 개가 빠져 짓궂어 보인다. 사내아이의 꼬질꼬질한 옷을 훑어보는 여선생의 눈빛이 곱지 않다. 남자는 그 여선생의 화려한 옷차림이 오히려 공원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한다.

“재호, 너 이리 와서 손들고 서 있어!”

사내아이는 금방 울상이 되면서 엉거주춤 두 팔을 들고 선다. 사내아이 등 뒤에 있는 대추나무가 바람에 비실댄다. 남자는 광경이 못마땅해서 하늘로 눈을 돌린다. 대여섯 마리의 비둘기가 잔디 위에 그림자를 던지며 뱅뱅 돌고 있다. 계속 배회를 하던 비둘기가 앉은 곳은 웅덩이처럼 패인 황토바닥이다. 비둘기들은 회색과 재색, 갈색의 털이 적당히 섞여있다. 먹이를 찾느라 눈알을 굴리며 종종 걸음을 치지만 공원은 이미 청소가 되어 있다.

“삐-익”

호루라기 소리에 비둘기는 날아가 버린다. 여선생이 거듭 호루라기를 불자 아이들이 부산해진다. 여선생은 시계를 자꾸 쳐다본다. 시계탑의 시계는 열한 시 반을 지나고 있다. 그림을 미처 그리지 못한 아이도 가방을 챙긴다. 아이들의 대열이 출입구에서 사라지자 공원이 적막해진다.

콕콕콕...호미질 소리가 되살아난다. 동사무소에서 동원된 희망근로자들이 잔디밭에 쭈그리고 앉아 있다. 그들 대부분은 노인들이다. 그들은 모자를 쓰고 그 위에 수건을 덮어써서 얼굴을 감추고 있다. 억센 잔디 틈에서 풀을 찾아 뽑아내는 중이다. 그들은 이야기를 나누고 있지만 남자의 귀에 닿는 말소리는 웅얼거림에 지나지 않는다.

남자는 그들의 이야기가 빤하다는 생각을 한다. 남자의 어머니는 사람들 틈에 끼면 늘 아들을 자랑했다. 거... 뭣인고 하니, 이번에 과장으로 승진 되얐다 하드라고요. 그 말을 하면서 어머니는 보잘것없는 부모를 자식이 대신 빛내 준다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남자는 과장생활을 삼년도 누리지 못했다. 해고당하던 날의 기분은 ‘아파트의 옥상에서 누군가에게 등을 떠밀린’ 그런 느낌이었다. 남자의 생각을 깨트리듯 공원 출입구에서 부우웅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마치 낮게 나는 비행기가 내지르는 굉음 같다.

고개를 돌리니 번쩍거리는 장식을 단 오토바이다. 호미질을 하던 사람들의 시선도 그쪽으로 쏠린다. 오토바이에는 열대여섯 살쯤 되어 보이는 사내 녀석이 앞에 앉았고 짧은 스커트를 입은 여자아이가 뒤에 앉아있다. 녀석이 재미삼아 속도를 줄였다가 늘리는 것 같다. 녀석의 앞 머리칼이 온통 얼굴을 덮고 있다가 속력을 내면 뒤로 젖혀지곤 한다.

여자아이는 가랑이를 힘껏 벌려 녀석의 엉덩이에 밀착시키고 있다. 녀석이 무어라고 소리를 지르자 여자아이가 깔깔거리면서 상체를 젖힌다. 작은 보시기를 엎어놓은 듯 빈약한 여자아이의 가슴이 드러난다. 여자아이의 눈두덩은 시퍼렇고 입술은 빨갛다. 부스스한 머리가 샛노랗다. 가르마가 머리 정수리를 타고 이마로 그어져 있고 오른쪽 머리카락에 꽃 핀이 꽂혀 있다.

불안해진 남자는 앞길을 따라 재빨리 시선을 옮긴다. 빨간티셔츠가 엉덩이를 씰룩이며 저만큼 가고 있다. 땀에 흠뻑 젖은 옷이 여자의 등에 찰싹 들러붙은 게 보인다. 줄에 매달린 강아지는 여자와 간격을 맞춰서 종종 걸음을 치고 있다. 여자가 뒤를 돌아보는 순간 오토바이가 휙 바람을 일으키며 지나간다. 오토바이의 굉음과 강아지의 비명 소리가 동시에 난다.

“아악!”

빨간티셔츠는 소리를 지르며 주저앉는다. 남자는 저 만치 가버린 오토바이를 노려본다. 뒤를 돌아보는 노란 머리칼의 여자아이는 이를 드러내며 웃고 있다. 여자아이의 얼굴은 마치 술에 취한 것처럼 보인다.

남자의 시선은 팔을 구부린 채 떨고 서 있는 빨간티셔츠를 지나쳐 널브러진 강아지 머리 근처에 멎는다. 머리에서 쏟아진 피가 타원형을 그리더니 뒷다리가 한차례 경련을 일으킨다. 여자가 강아지 앞으로 쓰러지듯 엎어지면서 울먹인다. 강아지를 쓰다듬는 여자의 손이 미세하게 떨린다. 희망근로자들과 운동을 하던 몇몇 사람들이 몰려와서 여자와 강아지를 빙 둘러싼다.

“비켜요. 비켜.”

청소부가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면서 소리를 지른다. 그의 손에는 비닐봉지와 물을 담은 바가지, 빗자루가 들려있다. 가까스로 일어난 빨간티셔츠는 두 손을 모아서 가슴부근까지 올린다.

“저런 것들은 철창에 콱 처넣어야 해.”

피 얼룩에 물을 끼얹어 빗자루로 쓸어낸 다음, 대걸레로 닦던 청소부가 한마디를 내뱉는다.

“쯧쯧. 세상이 어떻게 되려고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들이 저러는지 원.”

희망근로자 노파가 비닐봉지에 강아지를 담으며 중얼거린다. 빨간티셔츠는 멍한 표정으로 비닐봉지를 바라보고 있다.

“어린애들은 이런 것 보면 못쓴다.”

노파는 바로 앞에 서 있는 너덧 살쯤 된 여자아이를 나무라듯 말한다. 눈을 커다랗게 뜨고 있던 아이는 추리닝을 입은 젊은 여자의 다리를 꼭 끌어안는다. 피가 다 닦이자 모여들었던 사람들이 흩어진다.

빨간티셔츠는 가까스로 일어난다. 노파가 빨간티셔츠의 손에 비닐봉지를 들려준다. 출입구 쪽으로 걸어가는 여자의 다리가 허공을 딛는 것처럼 위태롭다. 여자의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파리 목숨보다 못한 강아지 목숨이 마음에 걸린다.

남자는 다니던 직장을 그만둬야 했을 때 이미 절반은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다른 직장을 구하기 위해 컴퓨터 앞에서 작성한 이력서만 해도 서른 개가 넘었다. 반 정도는 다단계처럼 이상한 회사였기 때문에 포기를 했고 괜찮다는 직장은 서류심사에서 탈락이 되었는지 면접을 오라는 전화가 없었다. 더러 면접을 마쳤어도 남자에게 출근을 하라는 통보를 하지 않았다. 대학 졸업장도 십몇 년이나 되는 실무 경력도 다 소용이 없었다.

아파트를 장만할 때 퇴직금을 당겨서 썼기 때문에 실직하면서 수령한 퇴직금은 얼마 되지 않았다. 시골에서 쌀이 올라온다고는 하지만 도시 생활이란 부수적으로 들어가는 게 너무 많았다. 벌지 않고 쓰다 보니 그야말로 곶감 빼먹기였다. 앞으로 서너 달을 버틸 만큼도 남아있지 않았지만 아내는 아침부터 색조화장을 하느라 화장대 앞에 앉아있었다.

화장대 앞에서 코웃음을 치던 아내를 떠올리는데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난다. 발을 뗄 때마다 앞으로 달아나는 그림자를 보니 점심시간에서 훨씬 벗어난 것 같다. 아내와 다투고 나왔기 때문에 점심을 먹기 위해 집으로 들어갈 수도 없다. 남자는 이른 시간부터 아내와 다투느라 아침밥까지 거른 상태였다.

얼굴에 흐르는 식은땀을 닦으며 남자는 의자를 찾는다. 이십여 미터쯤 앞에 느릅나무 그림자가 드리워진 빈 의자가 있다. 남자는 주춤주춤 다가가 힘없이 앉는다. 몸을 뒤로 젖힌 남자는 눈을 감으며 잠을 청해 보지만 머릿속은 헝클어지고 허기가 져서 잠은 쉬이 오지 않는다. 한참 후 매미소리와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아스라해진다.

“후식까지 다 먹었더니 배가 불룩하네.”

약간 쉰 여자의 목소리다. 마치 쇠붙이가 서로 긁히면서 나는 소리처럼 껄끄럽다. 남자는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리며 인상을 쓴다. 남자가 잠들기 전까지 비어있던 오른쪽 의자에 여자 둘이 앉아 있다. 남자는 그 여자들이 아파트 쪽의 출입구로 들어왔을 거라는 짐작을 한다. 한 여자가 이를 쑤시고 있다. 남자는 다시 꼬르륵대는 배를 두 손으로 꾹 누른다.

“늦게 먹으면 항상 많이 먹게 되더라고. 하... 공원 넓다.”

터진 치마를 입은 여자가 눈을 희번덕이며 말한다. 여자들의 한쪽 손도 각각 배에 얹혀있다.

“한 바퀴 돌아보았더니 제법 시간이 걸리더라구. 봐, 저쪽 끝이 통 보이지 않지?”

목이 쉰 여자는 이쑤시개를 잔디밭에 던지며 말한다. 여자들은 볼 살이 약간 흘러내리고 눈가에 부채꼴 모양의 주름이 잡혀있다. 화장을 진하게 해서 나이를 가리려 애썼지만 사십 중반은 되어 보인다. 미장원에 다녀왔는지 윤기가 흐르는 갈색의 머리칼이 탐스럽다. 앞이 뾰쪽하고 뒤 굽이 높은 까만 구두도 반들거린다. 목이 쉰 여자는 허벅지를 간신히 덮을 만큼 짤막한 치마를 입고서 다리를 포개고 있다. 미니스커트 보다 옆이 터진 치마를 입은 여자가 더 선정적이다. 남자는 다시 눈을 감아 버린다.

“그래도 오전 중엔 정말 따분해 죽겠어. 남편 봉급이 팍 깎인 데다 언제 잘릴지 몰라서 화투치는 것조차 눈치 보인다니까. 점에 삼백 원 씩 치던 걸 백 원으로 내리니까 진짜 재미없더라.”

남자는 그 소리에 다시 눈을 뜨며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니네야 무슨 걱정이니? 사십 평이 넘는 아파트에 살잖아.”

터진 치마의 볼멘 대꾸다.

“그래도 남편이 집구석에 나앉아 봐. 애들 교육비며 우리 노후대책은 어떻게 되고. 그 까짓 아파트 가지고는 어림도 없어. 참! 이 공원 저쪽 끝에 우리 노인네가 부쳐 먹던 밭이 있었을 거야.”

“그래?”

“꽤 오래된 얘기지. 마침 공원에 오니까 생각나네. 두 노인네가 밭 옆에 가건물을 짓고 살았어. 시어머니는 재개발 때 땅 대신 아파트를 줬다고 펄펄뛰다 화병으로 죽었어. 땅을 받으면 한쪽에 옹색하게 집을 짓고 나머지 땅은 밭으로 사용할 생각이었던 모양이야. 그랬다면 우리는 지금도 전세살이를 해야겠지. 아파트 너머 저쪽 동네는 그린벨트에 묶여서 값이 제자리걸음이래. 아마 아파트를 받지 않고 땅으로 받았다면, 그 땅도 그린벨트에 묶였을걸!”

미니스커트의 큰 목청에 운동을 하던 사람들이 힐끗거린다.

“아유, 부러워라. 우리는 노인이 물려준 논밭을 큰 형님네가 차지하고 살잖아. 나는 셋방 얻을 때 노인에게 몇 푼 받은 것 말고는 없어.”

“우리는 외아들이어서 살림을 합친 거라고. 요즘에 노인네 꼴 보는 며느리가 그리 흔한 줄 알아? 나나 되니까 여든이 다된 노인네 꼴을 보는 게지. 아침저녁으로 노인네 밥상 차리는 것 정말 지긋지긋해. 노인네한테 집 한 채 물려받으려고 십 년 동안 이 고생한 걸 생각하면 신물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 올 정도야.”

미니스커트는 입술꼬리를 한쪽만 올려 냉소적인 표정을 만든다.

“난 성질이 더러워서 못할 거야. 너나 되니까 그렇게 하지.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이 있잖니. 조금만 더 참아라. 노인네가 살면 얼마나 살겠어. 그런데 네 시아버지 점심은 어떻게 하니?”

터진 치마가 끄윽 트림을 하면서 말을 한다. 콧소리에서 아부가 느껴진다.

“노인정에서 얻어먹던가 아니면 식당에서 해결하겠지. 용돈 아꼈다 저승에 갖고 갈 것도 아니잖아. 난 처음부터 점심은 안 차려줬고 남편도 자기가 하는 게 없으니 그러려니 해. 노인과 함께 사는 것만으로도 효부야. 말이 나와서 말인데 요즘 고려장이 유행인 거 모르니? 여행가서 노인을 슬쩍 버리고 오는 것 말이야.”

미니스커트는 당당하게 말한다. 하지만 남자의 몸은 쐐기가 지나간 것처럼 따끔거린다.

“나도 들었어. 제주도에다 버린다고 하더라고.”

“모르는 소리. 필리핀에 버리는 경우가 많아. 치매노인이 아니라면 제주도는 탄로 나거든.”

소곤거리듯 말하지만 남자의 귀에 쏙쏙 들어온다. 남자는 짙은 화장 때문에 햇빛 아래에서는 다소 우스꽝스러운 미니스커트의 옆얼굴을 노려보다가 시선을 딴 데로 돌려버린다.

“네 말을 듣고 보니 제주도는 좀 그렇겠다.”

“노인보다 솔직히 딸년이 더 걱정이야. 머리를 샛노랗게 물들이더니 요즘 들어서는 가출을 일삼으니 말이야. 며칠간 집에도 안 들어오네. 아들은 안 그랬는데 걔는 왜 그렇지? 어렵게 살 때도 그 애는 풍족하게 해줬어. 사춘기 때 부모 속을 썩였다던 남편을 닮은 것 같아. 씨는 못 속인다니까.”

“애들은 그러다가도 크면 좋아지더라. 그리고 여자애들은 시집만 잘 보내면 그만이야. 학교 다닐 때 공부를 잘 했네 모범생이네 하는 것들 중 잘사는 년 몇이나 되든? 애들 어릴 때 신경 써봐야 크면 다들 제 맘대로야. 키우는 내내 고달프기만 하지. 춤을 배우면서 인생이 뭔지 알게 되었다고나 할까. 참 어제 손잡아 주던 핸섬한 남자 있지? 그 사람이랑 커피 한잔하기로 했어. 네 말처럼 실험을 해봤는데 허벅지에 닿을 때마다 몸이 꽤 단단하다는 걸 알겠더라고.”

터진치마는 머리카락을 만지는 척 화색이 도는 얼굴을 슬쩍 가린다. 여자들의 목소리는 사람들이 지나갈 때면 줄어들었다가 다시 커지곤 한다. 미니스커트가 터진치마의 손을 꼭 잡으며 목소리를 낮춘다.

“지난번처럼 남자에게 매달리면 안 된다는 걸 명심해. 알았지?”

“에이. 이번엔 절대 안 그러지.”

터진치마의 눈 흘김과 동시에 두 여자가 깔깔거리며 웃는다.

“자식이나 남편이 속 썩일 땐 커피 한 잔이 최고라니까. 하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남편에게는 잡아떼는 것 있지 마?”

“내가 병신인 줄 아니?”

“맞아. 너 병신 아냐.”

다시 웃음소리가 터진다.

“요즘 우리 노인네 이상해졌어.”

미니스커트가 속삭이듯 말한다.

“왜?”

“노인네가 밤에 가래를 굴리는 거야. 남편이 뭐라 하는데도 여전히 그래. 뭔가 박박 긁어 대는 것처럼 기분 나쁜 소리야. 들여다보니 불도 켜지 않은 채 손을 움직이고 있더라고. 성질나서 문을 쾅 닫고 잠을 청하는데 통 잠이 와야 말이지.”

“어쩐지 네 눈이 충혈 되어 보인다 했더니...야. 그거 노인네의 마지막 발악 같다. 건강하게 오래 살려고 가래를 굴린다고는 하지만 밤중에 이상한 짓을 하니 정신이 온전하겠어? 노인네 얼마 못 살 징조 같은데... 앞으로 너는 편해질 일만 남은 것 같다.”

터진 치마는 실눈을 만들어 웃는다.

“실은 나도 그런 생각은 잠깐 했어. 그건 그렇고 무도장 문 열었겠다.”

“어머, 벌써 그렇게 되었네. 얘. 내 얼굴 어때. 화장이 뜨지 않았니?”

“괜찮은 것 같지만 파우더로 좀 눌러주고 갈까?”

미니스커트의 말과 동시에 각자의 핸드백에서 콤팩트가 나온다. 두 여자들은 콤팩트를 열고 파우더퍼프로 얼굴을 톡톡 두들긴 후 입술을 벌려 이까지 점검한다. 일어서서 치마의 뒤쪽 주름을 펴는 동작까지 둘이 똑같다.

또각 또각...구두 뒤축소리에 여자들이 가는 방향으로 고개를 튼다. 남자는 출입구 사이로 여자들이 빠져나갈 때까지 노려본다. 시계를 들여다보니 세 시 반이다. 무도장이라는 곳이 세 시 반쯤에 문을 여는 걸까. 아니면 네 시쯤? 언젠가 아홉 시 뉴스 중 카메라 출동에서 그런 장면을 보았던 것 같다. 창고처럼 음침해 보이던 그곳에서 옷을 뒤집어 쓴 남자와 여자들이 카메라를 피하느라고 우왕좌왕 하던 것을.

일어서자 남자의 무릎에서 우두둑 소리가 난다. 남자는 잠깐 다리운동을 한 후 천천히 걷는다. 조금 걷자 초막을 타고 오른 수세미 덩굴이 보인다. 남자는 포장마차 우산만큼 작은 초막에 들어가 앉는다. 길게 뻗은 수세미 덩굴에 가려진 초막 안은 어둡다. 아이스크림과 모양이 닮은 노란 꽃이 줄기에 매달려 있다.

남자는 문득 아들을 떠올린다. 어릴 적 아들은 백화점에만 가면 비싼 아이스크림을 사 달라고 졸랐다. 두 가지 색상의 크림이 기계에서 나올 때에 맞춰서 손을 돌리면 예쁜 모양이 만들어지는 게 신기해서 그랬을 것이다. 그만큼 아들은 호기심이 많았다. 남자는 아들에게 아이스크림을 두어 번 사 준 다음 돈 귀한 줄 모른다고 나무랐다.

이젠 백화점 출입은 어림도 없을 것이다. 앞으로 몇 달, 아니 몇 년 동안 실직 상태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지금 아들이 옆에 있다면 주머니의 돈을 털어서라도 백화점에 데려가 아이스크림을 원하는 대로 사주고 싶다. 고개를 떨어뜨리고 있던 남자는 초막의 마루에서 일어난다. 가슴의 답답함을 해소하기 위해서 다시 걷는다.

이제 남자 앞에 펼쳐진 길은 오르막이면서 구부러져 있다. 달리기를 한다면 숨이 차오르는 코스이다. 남자는 힘차게 달리고 싶은 욕구를 느끼면서도 걸음은 형편없이 느려진다. 오른쪽으로 소나무 서너 그루가 서 있는 게 보인다. 큰 나무 사이에 작은 나무가 서 있어서 가족처럼 보인다. 남자는 입장료가 없는 이 공원이야말로 가족공원이라고 생각한다. 앞으로 가족과 함께 공원에 올 날이 있을까싶은 생각에 남자는 한숨을 뿜어낸다.

소나무를 지나치자 남자가 들어왔던 큰길 쪽으로 난 출입구가 보인다. 두 여자들이 나갔던 그 출입구와는 정 반대 쪽이다. 아이들이 그림을 그리다 떠난 자리에 열기를 잃은 햇살이 내려앉아 있다. 남자는 의자에 앉아 건너편을 바라본다. 노인이 길바닥에 긴 그림자를 떨어뜨리고 있다. 지팡이를 옆에 놔둔 채 그 자리에 여전히 앉아 있는 노인의 눈은 아예 초점이 없다. 얼굴빛이 몹시 창백해서 전혀 온기를 지닌 사람 같지가 않다. 가족이 없는 걸까. 점심은 어떻게 했을까? 남자는 이것저것 물어 볼까 하다가 그만 둔다. 본인에게 묻고 싶은 질문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해가 점점 더 커지면서 붉어진다. 붉은 덩어리는 이내 아파트 뒤로 숨고 시원한 바람이 인다. 사람들이 한꺼번에 몰려들기 시작한다. 무리를 짓는 사람들 때문에 공원의 길이 비좁아진다. 산책이나 운동을 위해 공원에 왔겠지만 시간대로 보자면 퇴근 후일 것이다. 퇴근. 얼마나 행복한 말인가. 남자의 고개가 잠깐 동안 앞으로 꺾어진다.

가족단위거나 연인으로 보이는 그들 때문에 남자는 외톨이가 되었다는 생각을 한다. 남자의 뒤쪽에서 불어 온 바람이 공원을 쓰다듬는다. 남자의 시선은 일렁이는 나뭇가지와 잎을 지나 하늘로 올라간다.

서쪽 하늘에 새털구름이 쫙 깔려있고 바람이 눅눅하다. 공원도 더 소란스러워진 것 같다. 새털구름에 붉은 물이 들기 시작한다. 남자는 노을이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붓에 흰색 물감을 찍어 한 방향으로 슬쩍슬쩍 휘둘러서 새털구름을 그리고, 거기에 엷게 푼 주황색 물감을 덧칠하여 노을을 그리던 소년시절이 떠오른다. 완성된 그림에는 노을을 배경으로 한 그루의 나무가 서 있었고, 그 나무에는 황금색의 열매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황금색에서 잿빛으로 변해가는 구름을 바라보던 남자는 문득 아내와 싸웠던 기억을 떠올린다. 남자는 한숨을 쉬며 잘만한 곳이 있나 둘러본다. 다행이 희망근로자들이 쉬던 정자가 있다. 남자가 반가운 마음에 웃음을 흘리는데 반응이라도 하듯 남자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연속된다. 배가 등가죽에 붙었다는 표현처럼 절박한 소리다. 남자는 주머니를 만지면서 공원의 출입구를 찾는다.

한참 후 공원으로 돌아 온 남자의 손에는 김밥과 소주가 담긴 비닐봉지가 들려있다. 빈자리를 찾아보지만 없다. 남자는 지팡이가 비스듬히 놓여있는 의자에 엉덩이를 디밀어 앉는다. 얼굴을 돌려 노인을 바라본다. 다른 사람들이 활기에 넘쳐서인지 노인에게서는 거의 생명력이 느껴지지 않는다. 남자가 김밥을 펼쳐놓자 가로등이 일제히 켜지면서 세상이 밝아진다. 대부분의 노인들은 눈이 침침하다거나 아니라면 귀가 어둡다. 남자는 노인을 바라보며 목청을 돋운다.

“댁은 어디세요?”

공원에서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던 탓에 남자의 목청은 다소 갈라진다. 노인이 얼굴을 조금 움직이더니 눈을 들어 멀리 바라본다. 그곳은 검은 하늘에 머리를 들이미는 것처럼 우뚝 솟은 아파트 꼭대기이다. 아파트를 보는지 하늘을 보는지 알 수가 없다. 남자는 노인이 고향을 떠올리고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김밥 좀 잡숴 보세요.”

남자는 웃는 얼굴로 노인에게 말한다. 노인은 머리를 흔든다. 남자는 더 이상 권하지 않고 김밥을 먹고 물대신 소주를 마신다. 첫 모금의 소주는 목구멍에 얼음처럼 닿는다. 남자는 달처럼 은색으로 빛나는 가로등을 바라보며 한 모금을 더 마신다. 겨우 두 모금에 가로등 빛이 흔들리는 것 같다.

몇 잔 더 마시자 얼근해진 남자는 눕기 위해 자리를 보지만 노인이 있어서 새우잠조차도 쉽지 않을 것 같다. 게다가 노인의 몸도 자꾸만 기울어지고 있다. 남자는 노인이 의자에 눕도록 자리를 비키면서 집 주소를 물어 봐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건너편에서 키 재기를 하고 있는 아파트에서 사는지 아니면 다른 곳에서 사는지를.

남자는 노인이 눕는 걸 확인한 다음 건너편 아파트에 불빛이 담긴 걸 본다. 아파트의 불빛은 규칙적으로 배열이 되어있다. 남자는 불현듯 상여를 떠올린다. 사춘기 시절, 장례 행렬을 따라 만장을 들고 갔다가 오는 길에 흰 종이꽃을 뽑아왔었다. 꽃이 탐스러워서였지만 어머니는 혼을 냈다. 저승꽃이라고.

밤이 이슥하도록 남자는 술기운에 사람들과 어울린다. 자기 앞으로 굴러 온 공을 던지다가 넘어진 꼬마를 일으켜 주기도 한다. 열한시가 넘자 사람들의 수효는 현저히 줄어든다. 가로등의 밝기는 변함이 없지만 사람이 빠져나가자 주변이 점점 어두워지는 것만 같다.

허탈해진 남자는 의자로 돌아와 남은 소주를 들이키며 누워 있는 노인을 본다. 남자는 노인 때문에 김밥이 절반이나 남았다고 생각한다. 다시 뚜껑을 딴 소주병이 반 정도 비워지자 남자는 연거푸 하품을 한다.

공원은 차츰 적막에 잠긴다. 가로등 불빛이 닿는 곳은 하얀 빛깔을 띠고 있지만, 나무 밑이나 언덕 쪽으로는 어둠이 웅크리고 있다. 시계탑의 바늘은 새벽 두 시를 가리키고 있다. 이제 공원에는 등받이가 있는 의자에 모로 누운 노인과, 통나무를 쪼개어 만든 의자에 엎드린 남자가 있을 뿐이다. 노인은 조용히 잠들어 있고 남자는 코를 골고 있다.

이지러진 달이 동쪽 하늘에 걸려 있다. 달 주변에 구름이 모여들고 점점 바람이 일기 시작한다. 몸을 긁어대던 남자는 벌떡 일어난다. 남자는 자기 집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는 깜짝 놀란다. 남자는 두리번거리다가 옆 의자에 누워 있는 노인을 본다. 노인의 몸은 의자 등받이 쪽을 향하고 있다. 듬성듬성한 노인의 뒤 머리칼이 바람에 떤다. 남자의 등골에도 서늘한 바람이 스쳐 간다. 남자는 하늘을 빼곡히 채운 구름을 보다가 노인에게 조심스레 다가간다. 남자는 노인의 어깨를 잡고 흔든다.

“할아버지! 할아버지!”

남자의 목소리가 공허하게 울린다. 노인의 어깨가 딱딱하다. 남자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노인의 몸을 더듬는다. 얼굴이 새파래진 남자는 다시 노인의 몸을 세차게 흔든다.

“할아버지!”

가슴에 얹혀 있던 팔이 의자 아래쪽으로 축 쳐지면서 무엇인가가 툭툭 떨어진다. 남자는 주워서 들여다보지만 무엇인지 확실히 알 수가 없다. 가로등에 비춰보던 남자는 호두라는 익숙한 단어를 떠올리다가 고개를 젓는다. 한쪽이 다소 뾰쪽하고 짙은 갈색을 띠고 있는 것으로 봐서 틀림없는 가래이다. 오랫동안 손을 탔는지 두 개의 가래는 반질반질 윤이 난다.

남자는 가래를 손에 쥐고 검은 구름이 달을 삼켜버린 하늘을 무연이 바라보고 있다. 문득 무도장에 간다던 두 여자가 떠오른다. 여자들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남자의 표정이 굳어진다. 갑자기 몇 방울의 비가 남자의 이마를 때린다. 바람에 너울거리는 빗방울을 보던 남자가 가래 쥔 손을 편다. 가래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남자의 얼굴이 일순간 밝아지면서 가슴에서 힘이 솟구친다.

‘가래가 싹을 틔울 수 있을까?’

남자는 중얼거리며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공원 구석으로 간다. 희열에 들뜬 남자의 뇌리에는 이미 열매를 매달고 있는 가래나무가 자리 잡고 있다. 남자는 노인의 죽음조차 까맣게 잊은 채 가래를 묻기 위해 땅을 판다.

 

                                                                                    -끝-

 

 

 

 

 

김은숙   2010-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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