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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편소설
삶의 끝에서 < 마지막 회>
삶의 끝에서 <세번째>
삶의 끝에서 <두번째>
삶의 끝에서 <첫번째>







 :: 삶의 끝에서 <세번째>


 

 

 

 

  

                                                                              7

요즘 들어 간병인의 스타일이 달라졌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가끔은 얼굴이 뽀얀 빛깔을 띠고 있는 걸 봐서는 파운데이션도 얇게 바르는 것 같았다. 늘 화장을 하는 아내의 영향을 받아서 그럴 수는 있겠다 싶었다. 타인에 대한 배려 때문에 화장을 한다는 아내에게는 거부감을 갖기도 했지만 간병인에게서는 이성적인 호감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눈꺼풀에는 갈색 샤도우를 바르고 입술은 연한 핑크였는데 펄이 들어가서 나이와는 어울리지 않았지만 나름 풋풋한 느낌도 있었다.

내 결혼생활은 이미 파경이나 마찬가지였다. 내가 쓸모없는 인간이 되었기 때문에 아내는 불륜을 당연시 하는 것 같았다. 게다 나를 하등동물 대하듯 했기 때문에 오히려 오기가 생겼다. 1퍼센트이든 0.1퍼센트이든 가능성이 있다면 나는 노력을 해서 기적처럼 일어나고 싶었다. 다시 시작할 수만 있다면 간병인처럼 헌신적인 성격의 아내를 얻고 싶었다.

최근 들어서는 삶에 대한 욕구가 점점 커져가고 있었고, 사고력이 더 좋아지는 느낌이었다. 때로는 간병인과 한 공간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엔도르핀이 혈액처럼 온 몸을 타고 도는 것 같았다. 간병인이 내게 던지는 말은 여담처럼 가벼웠고 더러는 좀 웃기기도 했다. 간병인이 갖고 있는 장점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사투리가 섞인 그 언어들은 무더위에 지쳐 있을 때 누군가가 불쑥 내미는 아이스케이크처럼 특별한 맛을 지녔다고 할 수 있었다.

“지 팔자가 좋아서 상감마마를 모시며 사나봐유.”

내가 손가락 까딱 안 해도 모든 게 다 해결되는 것을 빗대서 하는 말이라서 우스웠다. 한편 간병인이 던지는 농담에 마음껏 웃을 수 있는 날이 올 수 있을까하는 생각을 하다보면 서글프기도 했다. 팔다리를 쓰지 못하면 말이라도 자유롭게 할 수 있던지, 아니라면 말은 못해도 좋으니 팔다리만이라도 자유자재로 쓸 수 있었으면 싶었다. 아기가 세상에 나가기 위해 두 다리로 몸을 지탱하고 섰을 때 받는 박수를 떠올려보기도 했지만 그런 기대를 가져도 되는 것인지 의문스러웠다.

목숨을 건진 것만으로도 다행, 이라는 말은 재활치료에 대한 기대를 하지 말라는 말을 에둘러 표현한 것 같다. 아직까지도 나는 재활과는 거리가 먼 환자이다. 아들은 병원생활이 학업에 지장을 초래한다고 했고 아내는 비위가 맞지 않아서 힘들다고 했다. 건강보험 외에도 아내가 가입해둔 민간보험이 있기 때문에 병원비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 듯싶었다. 결국 퇴원은 아들이나 아내의 이기심에서 결정되었다고 할 수 있었다. 실낱같은 희망 하나만으로 병원에서 지내는 환자들이 얼마든지 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내겐 부당한 결정이었지만 나로서는 어쩔 수 없었다.

병원에서 내가 퇴원하던 날 간병인은 거처를 우리 집으로 옮겼다. 간병인이 오면서 가족은 네 사람이 되었고, 방을 각각 하나씩 차지하게 되어 여분의 방이 없어서 친척들도 오면 금방 돌아가 버렸다. 환자를 두고 이러쿵저러쿵 간섭하는 사람도 자연 줄어든 셈이었다.

온 종일 누워서 놀지만 중환자에게는 고문이나 마찬가지이다. 늦은 밤에는 계속 깨어있으면 불안하기 때문에 가끔은 나도 잠이 들기 위해 별이나 양을 헤아리기도 한다. 누이가 몸부림치던 어둡고 비좁은 광을 떠올리면 나는 가해자일 뿐이었고 따라서 심리적 압박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밤이건 낮이건 가수면 상태일 때가 많았고 꾸는 꿈 중 반은 가위눌림이었다.

밤에는 깨어 있어도 편하지 않았다. 취침용 등을 켜 놓긴 했지만 파르스름한 그 불빛이 오히려 사물을 왜곡시켰고, 왜곡된 사물들이 망상을 부추겼다. 아이들이 갖는, 밤에 대한 편견과 비슷한 현상이었다. 때문에 깨어 있더라도 눈을 꼭 감고 있어야만 했다. 그러다가도 새벽이 오면 마음이 편해지고 곧 잠에 빠졌다. 새벽에 들여다보는 아내에게 돼지새끼처럼 잠을 잔다는 소리를 들을 때가 더러 있었다.

단잠은 오래 가지 않는다. 다만 꿈이 잦은 이유는, 꿈속에서 언어가 자유롭고 몸이 자유롭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꿈을 꾸면 현실감각이 떨어져 기분조차 나락으로 떨어지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되도록 주변의 누군가에게 마음을 의지하려 애를 썼고 그 사람이 바로 간병인이었다. 간병인이 외출을 하면 시간을 헤아리면서 기다리기도 했다.

간병인은 늘 반바지와 티셔츠 차림이었다. 머리는 어중간한 길이의 파마였는데 어느 때는 묶기도 했다. 묶어봐야 토끼 꼬리 정도였다. 일을 할 때면 귀 옆으로 빠져나와 나풀거리는 머리칼을 한참동안 바라보기도 했다. 내 머리칼이 그동안 많이 빠졌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숱이 많은 간병인의 머리가 부럽기도 했다.

나와 함께 지낸 일 년 반 동안 간병인이 꽤 늙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내 얼굴은 어떤 상태일까 몹시 궁금했지만 아무도 거울을 보여주지 않았다. 어차피 나를 인식능력이 없는 존재로 여길 것이니 거울 따위는 필요 없을 거라고 생각할 것 같았다.

가끔 간병인이 내 곁에서 낮잠을 자고 있을 때가 있었다. 항상 나를 등진 자세였기 때문에 함지박만한 엉덩이에 저절로 눈이 갈 수밖에 없었다. 엉덩이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내 물건이 반응을 일으키기도 했기 때문에 되도록 무심해지려고 애를 썼다. 갱년기를 훌쩍 넘긴 나이의 간병인은 이미 여자도 아니다, 라는 억지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해도 간병인은 미련할 정도로 큰 젖가슴과 펑퍼짐한 엉덩이를 가진 여자임에는 틀림없었다.

놀라운 건 간병인이 지렛대 같은 여자라는 점이었다. 내가 약간의 설사를 하던 날 간병인은 불가사의한 힘을 여지없이 발휘해버렸다. 변의 양이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젖은 휴지만으로도 충분히 처리 할 수 있었지만 간병인은 두 팔을 등 뒤로 찔러 넣는가 싶더니 나를 번쩍 들었다. 워낙 끙끙거렸기 때문에 걸음을 옮기지도 못하고 함께 나뒹굴까봐 걱정을 했지만 무난히 간이욕조 앞으로 갔고 물속에 나를 내려놓았다. 그 뒤로도 간간히 혼자서 나를 씻겼는데 처음과는 달리 요령이 생긴 듯 낑낑대는 소리를 내지 않았다. 감당하기 힘든 일을 하면서도 내게 짜증한번 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아무래도 인간적인 면에 더 끌리는 것 같았다.

화장실에서 간병인이 일을 하는 모습을 즐거운 마음으로 바라보곤 했다. 안방에 딸린 화장실에서는 걸레를 빨거나 이를 닦는 따위의 사소한 일을 했기 때문에 비교적 짧은 시간이었다. 간병인이 눈에 뜨이지 않는 곳에서 일을 하게 되면 귀를 기울여서 무엇을 하고 있나 짐작해보곤 했다. 내가 상상력을 펼칠 수 있는 시간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특히 샤워를 할 때면 귀가 쫑긋거려지기도 했다. 거실에 딸린 욕실이라서 변기 스위치를 누른 다음 물이 차오르는 소리와 샤워기를 놓는 소리만 또렷하게 들렸지만 나는 낯 뜨거운 상상을 하면서 침을 흘릴 때가 많았다. 성적인 욕구가 침샘을 자극한다는 것을 다시금 깨달았던 시간이기도 했다.

아내가 집을 자주 비우게 되면서 간병인 혼자서 나를 씻기는 일이 잦아졌다. 요새는 내 하반신을 씻길 때마다 생리적인 현상이 반복되었고 간병인은 모른척하면서 나를 씻겼지만, 내 등 뒤에서 젖가슴이 물 밖으로 나온 물고기처럼 벌떡댄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심장 때문이겠지만 마치 젖가슴이 내 등을 탁탁 때리는 것 같았다.

내가 병원에 있었을 때 아내가 농담 삼아 간병인에게 짓궂은 질문을 던진 적이 있었는데 간병인은 얼굴빛하나 변하지 않았다. 남자의 물건이 대수롭지 않다는 대답이었는데 그때만 해도 간병인은 그 말에 걸 맞는 분위기를 가진 나이 든 여자였다.

“이 냥반이 오늘 따라 왜 이런디야?”

물속에서 계속 꿈틀대던 내 물건을 주시하던 간병인이 중얼거렸다. 내 등이 젖가슴을 눌러대자 떼어냈는데 몸이 아래쪽으로 미끄러지면서 내 정수리에 오른쪽 유방이 얹혔다. 긴장 때문이었는지 덤벙대던 간병인은 내 팬티를 거꾸로 입혔고 파자마는 입히지도 못하고 일어섰다. 갈팡질팡하다가 내 아랫도리에 파자마를 입히는 것까지도 까먹고 있었다.

간병인은 거의 자리를 비우지 않았지만 가끔은 외출을 했고 때로는 외박을 할 때도 있었다. 간병인에게는 공휴일이 없었기 때문에 그 정도의 편의는 봐줘야만 했다. 아내는 간병인과의 약속시간을 거의 지킨 적이 없었다. 간병인이 옷을 입고서 발을 동동 구르면 아내가 약속시간을 어기는 중이라 할 수 있었다. 아내는 싫은 소리를 입 밖으로 내 보이는 대신 약속시간을 어겨 간병인을 무시했지만 눈치를 채지 못하는 것 같았다.

시계를 몇 번이나 들여다보던 간병인이 가방을 접힌 팔에 걸었다. 신발을 신으면서 뭐라고 구시렁대는 것 같았지만 내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현관문이 닫히자 세상과 단절되는 느낌이 들면서 허탈했다. 요새 들어 부쩍 생리적인 현상이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에 간병인이 부담을 느낄 것 같았다. 나는 칭얼대는 어린아이처럼 간병인을 잃어버릴까봐 걱정하고 있었다.

이런저런 잡념을 몰아내기 위해서 잠을 청해봤지만 오히려 눈이 말똥말똥했다. 적막하다는 느낌이 들자 일부러 귀를 쫑긋 세웠고, 주변의 다양한 소음들이 깨어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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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큰 소음은 거실에 놓은 괘종시계에서  초침이 내는 소리였다. 스타카토처럼  톡톡 끊기기 때문에  내 손가락이 소리를 따라  까딱거렸다. 괘종시계는 15년 전쯤 중고시장에서 구해온 중고 제품이었는데 테두리에 용이 감겨 있었다. 용의 비늘 하나하나까지 정교하게 조각이 되어서 첫눈에도 고급스러웠다. 골동품의 값어치를 잘 아는 아내의 선택이었지만 내가 보기에도 꽤 흡족한 모양새였다. 보름에 한 번씩 태엽을 감으면 초바늘이 움직이고 종이 뎅뎅거리는 수동시계였다.

건전지를 끼우는 제품은 적어도 일 년 이상을 버틸 수 있는데 보름에 한 번씩 태엽을 감아야 하니 귀찮은 일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요새는 그것조차 간병인이 하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가끔 간병인이 시계의 태엽을 감으면서 사람도 고쳐 쓸 수 있는 기계처럼 살았으면 좋겠다는 말을 할 때가 있었는데 마치 나를 두고 하는 말 같았다.

나는 초침소리에 맞춰 숫자를 알아가는 아이처럼 혀끝을 움직이곤 했다. 헤아리다가 스르르 잠이 들기도 했지만 시간의 숫자대로 종을 치는 소리에 깜짝 놀라서 눈을 뜨기도 했다. 시계소리가 잠을 깨우기도 했고 더러는 잠에 빠지게도 했다. 잠이 들었던 나는 생소한 소리 때문에 깨어났는데 거실에 불이 켜져 있었다.

아내는 내가 자는 틈에 들어 왔던 것 같았다. 달그락 거리는 소리와 함께 내 코에 스며드는 냄새를 맡으면서 나는 갈치조림을 떠올리고 있었다. 햇무를 넣어서 푹 끓이면 밥도둑이라는 말을 들을만한 찌개였다. 간병인에게 죽을 얻어먹은 상태였지만 다시금 허기가 졌다. 나는 입안에 고인 침을 제때 삼키기가 어려워 게처럼 입 밖으로 밀어내고 있었다. 볼을 타고 흐르던 침이 베개를 적시자 아내가 얼굴이 닿는 부분에 거즈손수건을 끼우고서 눈을 흘겼다. 아내는 내가 침을 흘리는 이유를 잘 알고 있었지만 간단히 무시해버렸다.

주방의 환기구는 음식물 냄새의 입자를 한꺼번에 내보내지 못했다. 음식냄새는 마치 나를 고문하듯 집안을 떠돌다가 천천히 사라졌다. 차츰 음식 냄새가 사라지면서 전혀 다른 냄새가 내 기억의 세포를 일깨우고 있었다. 아들이 좋아하는 롤 케이크 냄새였다. 설탕과 계란과 버터가 적절히 섞인 달콤한 냄새였다. 아내는 밥을 먹어 배가 부르다하면서도 케이크 접시를 거실의 유리 탁자에 놓았다. 아들이 주방에서 자른 케이크를 가져가는 동안 나는 화들짝 놀랐는데 이유는 오늘이 아들의 생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일찍 나간 이유가 아들과 점심을 먹기 위해서였던 것 같았다. 아침에 미역국을 끓였다면 나도 짐작을 했겠지만 아침식탁에서는 토스트와 우유냄새가 났다. 식성이 다른 간병인은 전날 먹었던 무국을 데워서 식사를 했다.

간병인과의 약속시간에서 한 시간 남짓 벗어난 시간에 들어온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외식은 보통 한식이나 일식, 스테이크처럼 가격이 높은 음식을 선호했는데 아내와 아들은 예전처럼 외곽지역으로 가서 점심을 해결했을 것 같았다.

“케이크 드리면 안 되겠죠?”

“아서라. 아까 아줌마가 죽 드렸다고 했어. 빵은 삼키기도 어렵고,..”

“할머니 얘기로는 못 먹고 죽으면 원통하다던데...”

“뜬금없는 소리는 왜 하니? 그런 말 하려면 차라리 드라마나 보거라.”

내 어머니 얘기를 입에 올렸기 때문에 아내의 말투가 냉랭해진 것 같았다.

“보험 해결 하셨어요?”

아들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아들이 내 눈치를 보는 것 같아서 나는 귀를 쫑긋 세웠다. 텔레비전 소리와 뒤엉켜 있었지만 나는 필요한 말만 선택해서 듣고 있었다.

“두 군데서는 돈이 다 나왔다.”

“그래요?”

“하필 뇌질환으로 쓰러지니 우리도 할 말이 없는 거지. 일 년 동안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

아내는 병원생활을 하던 일 년을 얘기하고 있었다.

“그래도 건강보험으로 일부는 해결했고 일부는 민간보험에서 충당을 했으니 잘 된 거잖아요.”

“그걸 찾아 먹으려고 얼마나 애쓴 줄 아니? 가입할 당시에는 혈압으로 쓰러질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네 아버지는 본태성 혈압이라 일찍부터 약을 먹어야 한다고 했지만 차라리 약을 먹지 않았다면... ”

아내는 말을 하다말고 그만두었다.

“아무튼 보험을 세 구좌나 넣었지만 겨우 넣은 만큼만 타먹는 것 같다.”

“그 정도밖에 안되나요?”

“그건 아닌데 별로 이득이 없다는 것이지. 이젠 다 소용없는 얘기이고...이런 상태라서 앞으로 계속 골치 아플 거야. 보험료를 내야 하거든. 사망이나 해야 다달이 보험료 나가는 것은 끝나고 몫 돈을 좀 받을 수 있다고 하더라.”

잠깐 말을 멈춘 아내는 한숨을 쉬었다. 민감한 얘기라서 아들의 눈치를 보는 것 같았다. 아들은 생각을 하는 듯 말이 없었다.

“네 애비가 이런 상태로 10년 이상을 산다고 가정해봐라. 집안이 어떻게 될지...”

“알아들었으니 그만하세요.”

“그래. 내가 속상해서 괜한 소릴 했다. 아직은 생활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니지만 앞으로 수년 동안 이런 상태라면 생활도 그렇고...”

“아직 괜찮은데 왜 미리 걱정을 하세요? 내가 졸업하면 또 취직도 할 텐데...”

내가 중간에 이직을 했기 때문에 퇴직금을 연금으로 전환할 수 없다는 점 외에는 거의 문제가 없었다. 술은 좀 좋아했지만 나는 전혀 낭비적인 생활을 하지 않았고 중간에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재산도 좀 있어서 내가 10년이 아니라 20년을 누워있다고 해도 지장을 받을 정도는 아니었다.

“고맙구나. 취직해서 엄마까지 챙긴다니...”

“그러니 아버지가 회복되는 날만 생각하기로 해요.”

아내가 극히 이기적인 생각을 드러냈지만 아들은 과히 나쁘다고 생각하진 않는 것 같았다. 부부는 남이라는 말이 딱 들어맞았고 자식은 혈연관계라서 다르다는 말도 맞는 것 같았다.

“참 지난번 중국 갔던 친구에게 부탁 했더니 웅담을 사왔더라. 아버지가 드시면 어떻겠니?”

조심스럽게 운을 떼는 아내의 얼굴이 침이라도 뱉고 싶어졌다. 계산되어진 말이라는 것을 아는 까닭이었다. 웅담에 관한 통화는 꽤 오래전에 했었고 받아서 붙박이장 깊숙이 들어 간 것은 벌써 열흘 전이었다. 휴대전화를 귀에 대고서 이왕이면 건강한 사람이 먹어야겠지. 소곤거리던 아내는 덧붙였다. 그래 맞아. 오래 살면 나만 골치 아프니까.

"어머니나 드세요. 아버지는 몸이 약해서 오히려 독이 될 수도 있어요."

이미 아내의 속을 꿰뚫었는지 아들이 명쾌한 답을 내었다.

“그런가? 난 거기까지는 생각 못했네.”

아내는 늘 이쪽저쪽의 눈치를 봐서 적당한 대답을 고를 때가 많았다. 잠시 침묵이 흐르자 텔레비전의 볼륨이 높아졌다. 드라마에서 사람들이 악다구니를 쓰고 있어서 어수선한 분위기로 흘러가고 있었다. 귀를 더 기울여야 대화를 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시력도 좋아지고 간이 약한 사람에게도 좋다하니 너도 먹어라. 네 애비 덕분에 너랑 나랑 호사하는구나. "

약간 과장된 표현처럼 느껴졌지만 실은 교묘한 말 돌리기였다.

“간이 약하다는 생각을 해보지 않았는데?”

“애기 때 황달 때문에 병원 다녔다고 말한 거 잊었구나?”

아들은 신생아 때 황달이 상당히 오래 갔기 때문에 병원에 다닌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 무렵의 황달 때문에 간이 약하다고 말한 건 억지였다. 아들은 신체검사를 할 때마다 전혀 문제가 없었다. 아들은 아내의 관심이 좋은지 뭐라고 연이어 말을 하다가 웃음을 터트렸다. 모자가 허심탄회하게 얘기를 나누면 선뜻 끼어들지는 못했지만 그들을 번갈아 바라보면서 웃던 기억은 많았다. 여전히 나는 그들과 가족이었지만 이방인이 된지 오래였다.

아내는 아들이 기저귀를 갈겠다고 하자 관두라더니 안방으로 왔다.

“정신 나간 여자네. 빨래도 안 걷고...”

짜증난 투로 중얼거리다가 내가 덮고 있던 이불을 젖혔다.

“꼴사납게 파자마는 왜 벗었대?”

평소에 비해 큰 소리였다.

“아버지가 파자마를 벗어요?”

거실에서 뛰어오면서 아들이 호들갑스럽게 물었다.

“안 입힌 거겠지. 게다 팬티는 왜 또 뒤집어 입었지?”

마치 내가 잘못이라도 한 것처럼 나를 노려보더니 팬티를 확 잡아서 벗겼다. 내 눈 밑에 한차례 경련이 지나갔지만 둘 다 알아채지 못했다. 아들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내 몸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기저귀가 빠지면서 하반신이 형광등 불빛 아래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내 물건은 평소보다 더 쪼그라들어 있었고 아들은 얼굴을 돌리더니 방을 나갔다.

 

                                                                                9

내가 죽으면 아내의 인생은 다림질을 하는 것처럼 좍 펴질 것이다. 지금의 상황을 견딘 것만으로도 보상 받아 마땅하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기분은 언짢았다. 이미 남이 되어버린 아내를 질투하는 건 투병을 하는 사람의 자세가 아닐 것 같다. 몇 가지 징후로 보건데 나는 조금씩 나아지고 있었다. 가장 핵심적인 것은 역시 성적인 능력이었다. 아내가 안다면 외도를 그만둘까? 자문해 보았지만 긍정적인 답이 나오지는 않았다. 성격상 아내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도록 하는 음흉한 여자였다.

겉보기에는 완벽한 외모의 여자였지만 아내는 치명적인 결함을 가지고 있었다. 그 부분은 나를 속였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결혼 전까지 나는 아내의 손만 겨우 잡아 본 상태였고 신혼여행지에서 첫날밤을 보내야 했다.

침침한 불빛 아래서 아내는 옷을 얼른 벗지 못하고 뭉그적거렸다. 팬티만 입고 있던 나는 아내가 겉옷을 벗을 때까지는 인내심을 갖고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아내의 브래지어를 끌렀을 때 양쪽에서 캡이 두 개씩 떨어지는 것을 보았고 찻잔의 뚜껑만한 젖가슴을 보았다. 성장하다 만 것 같은 젖가슴은 캡에 짓눌려서 겨드랑이 쪽에 주름이 져 있었다. 주름이야 곧 펴졌지만 젖가슴은 노출이 되니 오므라드는 것 같았다. 꼭지만 발딱 일어나 있어서 픽 웃음이 나올 것 같은 순간이었다. 나는 등을 꺼버리고 아내의 젖가슴을 만졌다.

아들을 낳은 후에도 젖가슴은 커지지 않았고 따라서 모유를 먹일 수가 없었다. 생각해보니 나에게도 아들에게도 전혀 쓸모가 없는 젖가슴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아내를 미워했던 것은 아니다. 연애 경험이 전혀 없던 나는 아내의 부드럽고 사근사근함이 무척 좋았다.

아내는 어떤 상황에도 품위를 잃지 않고 조용조용 말하는 습관이 있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점이기도 했다. 결혼 몇 년 만에 미국에 파견근무를 할 때까지만 해도 나와 아내 사이는 문제는 전혀 없었다. 미국 체류 이 년 만에 국내로 돌아와야 했지만 아내는 아이가 영어를 습득할 때까지 미국에 머물겠다는 고집을 부렸다. 결국 아내는 아이와 남았고 나는 돌아와서 사표를 냈다.

내가 다닌 회사는 대기업체에 속했는데 주말의 개념도 없었고 주중에도 밤 11시나 12시까지 일을 해야만 했다. 사표를 낸 후 대학 때부터 생각해봤던 행정고시를 목표로 잡았고 공부를 시작했다. 아내도 내 생활을 불편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강하게 반대는 하지 않았다. 다만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골치가 아파질 수도 그건 내 소관이었다.

아는 집에 들어가서 가정부 노릇을 하던 어머니와 살림을 합친 이유는 아내의 권고 때문이었다. 한국으로 들어올 때까지도 나는 어머니가 외로움 때문에 힘들었다는 것을 짐작하지 못했다. 어머니와 살면서 가끔 옛이야기를 하게 되었고 그때부터 나는 죄의식이 생겼던 것 같았다. 그런 이유 때문에 공부에 더 몰입할 수밖에 없었고 생각보다 빨리 행정고시를 패스했다.

아들의 영어교육은 아내의 욕심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에 전혀 나를 고려치 않았다고 할 수 있었다. 아내가 미국에서 어떤 생활을 했는지는 궁금하지 않다. 다만 이런저런 과정 때문에 넉넉한 생활비를 보낼 수는 없었고 그것 때문에 불만이 많았던 아내는 아들이 일곱 살이 되자 미국에서 나왔다.

어머니와 자연스럽게 합친 경우라 할 수 있었지만 불협화음이 더러 느껴지기도 했다. 다만 아들이 워낙 제 할머니를 따랐기 때문에 아내가 냉정하게 하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천성적으로 붙임성이 좋은 아들이 내 가정의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었다. 어머니가 가정부를 노릇을 해서 내 뒷바라지를 했다는 건 이미 아내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고 따라서 연민 때문에라도 잘할 것이라는 생각은 나만의 착각이었다.

어머니가 우리와 한 가족이 된 후 얼마동안 호사를 누렸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어머니와 얘기를 나누어 본적이 없으므로. 어머니는 천덕꾸러기가 되어가고 있었지만 짐작도 못했다. 어머니도 무심하게 대하는 아들을 자신의 편이라고 생각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외출했다 돌아 온 아내가 냉장고를 들여다보며 지껄이는 소리를 우연히 들었다. 몸이 좋지 않아서 나는 그날 집에 일찍 들어와 누워 있었다. 어머니가 내 구두를 닦아 신발장에 넣어 두었던 것은 의도적이었을까? 어머니는 한 번도 아내가 자신을 소홀히 대접한다고 내게 말한 적이 없었다. 어머니는 자신이 자식에게 얹혀 지낸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만 했던 것 같다.

“왜, 어머니는 맨날 이 모양이에요? 찌개를 흘렸으면 제대로 닦을 일이지. 하는 짓마다 꼭 식모 수준이라니깐.”

뒤쪽의 말은 중얼거렸지만 나는 정확하게 들을 수 있었다. 아내는 안방 문을 열다가 내가 침대에 누워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서 멈칫했다. 그러더니 아양 부리듯 왜 일찍 들어왔느냐며 몸이 아프냐고 물었다. 이불을 젖히고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아있던 내 손은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아내의 교묘한 말솜씨를 당할 재간이 없었고 아내의 따귀라도 때릴만한 배짱이 없었다. 나는 침묵은 지켰지만 어머니에게 함부로 한다는 말을 뱉어내지 못했다. 그 후 어머니는 말이 적어지면서 시름시름 앓았다.

급격하게 몸이 나빠진 어머니는 누이 얘기를 자주 했다. 그때까지 살았으면 자식을 둘 이상은 두었을 것이며 손녀딸이 지 어미를 닮아 예뻤을 거라는, 대부분 그런 내용의 말이었다. 아버지에게는 할 만큼 한 어머니였기 때문에 아버지에 대한 미련은 없었겠지만 딸에 대해서는 심한 죄책감을 갖고 있었던 것 같았다.

양푼에다 비빈 그 밥을 다 먹어서 미웠다면서 어머니는 계속 눈시울을 닦아냈다. 아구처럼 남의 것까지 먹어 조지니까 광에서 못 내놨지, 라는 말을 하면서 혀를 차던 어머니였다. 죄인이라면서 가슴팍을 퍽퍽 두드려대는 어머니 또한 열여덟이라는 꽃다운 나이에 죽을 수밖에 없었던 딸을 방기한 죄였다. 아들인 나에게 쏟았던 정성의 반만 쏟았다 하더라도 누이가 그리 되지는 않았을 거라는 어머니의 탄식이 흉기처럼 나를 찔러대면 나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앉아있었다.

어머니의 급격한 태도의 변화는 죽음의 예고나 마찬가지였다. 그동안 가슴에 담아 두었던 며느리에 대한 감정도 때론 울음 섞인 탄식이 되어 쏟아져 나왔다. 물을 아낀다며 소변을 두 번 본 다음 물을 내리는 습관을 가졌던 어머니는 힐난하는 아내의 눈빛이 두렵다고 했다. 시골의 이집 저집의 닭을 잡아가던 살쾡이 눈빛을 닮았다는 얘기였다. 나는 아내에게서 순수한 누이의 눈빛을 보았는데 어머니에게는 전혀 달라 보였던 것이다.

소심한 아들을 위해서 단 한 번도 화를 내지 못했던 어머니는 가끔씩 가슴의 골 사이를 문지르면서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을 때가 있었다. 나는 어머니의 가슴 속에 비밀이라도 담긴 줄 알았지만 실은 그게 아니었다. 어머니의 가슴에서 거북이 등껍질 같은 문양의 피멍을 보았던 건 어머니의 죽음 후였다. 마치 바늘로 찔러 댄 것 같은 자국이었기 때문에 주먹으로 두들긴 자국이라고 믿기 어려웠던 그 시퍼런 빛깔의 무늬는 두고두고 나를 괴롭혔다.

어머니와의 갈등 후 아내를 예전처럼 대하지 않을 수밖에 없었지만 옳은 처사는 아니었다는 생각을 한다. 아내는 한 때 천주교회를 나간다면서 성서와 묵주 따위를 손에 들고 다니기도 했다. 아내와 화해를 하지 못한 이유는 소심한 내 성격 때문이었다. 물론 두 사람 서로를 솔직하게 대하지 못했다는 점도 상황을 나쁘게 만든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내 인생은 그 시점에서부터 나락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던 것 같다.

 

 

                                                                          -계속-

 

 

 

 

김은숙   2010-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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