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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령작가 (8)

                                               



                                                                   15

  내일은 발리에서 밤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에 기분이 조금씩 풀리고 있었다. 원고를 앞에 두고 있던 나는 L을 떠올렸다. L은 콘티 작업만 끝낸 원고를 읽으면서도 킥킥거리곤 했다. L은 생긴 것과는 달리 청소년기 때 만화를 무척 좋아하는 아이였다. 발리에서 나와 함께 지낼 때 L은 컴퓨터 게임을 즐겼다.

  L은 컴퓨터로 생산해낸 게임 속의 여자처럼 풍만한 가슴과 가는 허리를 갖고 있었다. 달빛에 빛나는 박처럼 하얀 젖가슴은 누워있어도 납작해지지 않았다. 하얀 박을 반으로 쪼개서 나란히 엎으면 딱 L의 엉덩이 모양이었다. 섹스 하는 동안 L은 액체처럼 흘러 녹았다 정사가 끝나면 다시 제 모습을 찾는 것 같았다. 나는 L과의 섹스를 떠올리다가 하마터면 원고에 침을 떨어뜨릴 뻔했다.

  마치 내게 할말이 있는 것처럼 여자는 거실에서 서성거리다 들어가곤 했다. 술을 마시면 발산되는 열을 감당하지 못하는 탓에 여자는 브래지어와 팬티 차림이었다. 거실 천장에 붙은 원반 모양의 형광등이 몸의 군더더기 살까지 제대로 드러나게 하고 있었다. 나는 균형이 전혀 맞지 않는 여자의 몸을 쳐다보다 원고지로 시선을 옮겼다. 작업하는 걸 여자가 직접 들여다보진 않았지만 불안해서 나는 원고를 뒤바꿔놓기도 했다. 스토리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원고를 들여다보는 척 하면서 곁눈으로 계속 여자의 거동을 살피고 있었다.

  여자의 시선은 아래쪽으로 약 45도 정도의 각도여서 그늘져 보이는 것 같았다 당장 여자가 원한다고 해도 섹스를 해 줄 수는 없었다. 따라서 나는 여자가 잠이 들 때까지 작업을 하는 척이라도 해야 했다. 나는 건넌방에 가서 작업할 원고용지를 전부 다 가져왔다. 소파에 앉아 있던 여자가 눈을 감았다.

  "잠이 안 와?"

  내 물음에 여자는 눈도 뜨지 않고 고개를 가로젓더니 일어났다. 방으로 들어가는 여자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여자의 오른편 날갯죽지 쪽에 팥알만한 점이 있었다. 등이 넓은데다 점이 있어 보기 흉했다. 차라리 옷을 입고 있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여자란 아름답게 늙을 필요도 있었다. 게다가 거의 맨 얼굴인 여자에게서는 도회지적인 세련미는 찾아 볼 수가 없었다.

  다시는 보지 않아도 될 얼굴과 몸매라는 생각을 하면서 원고를 뒤적거렸다. 이곳에 와서 사흘 동안 작업했던 원고가 채 스무 장이 안 되었다. 한심하다는 생각을 하는데 이상한 소리가 났다. 신음소리 같기도 하고 짐승의 울음소리 같기도 해서 소리 쪽으로 귀를 기울였다.

  매미 소리에 가려졌던 것 같았다. 점점 크게 들리는 여자의 울음소리였다. 나는 부리나케 방으로 들어갔다. 엉엉 우는 여자의 얼굴은 눈물과 콧물이 범벅이 되어있었다. 나는 서랍에 있던 수건을 꺼내어 여자의 얼굴을 닦았다.

 "왜 그래? ?"

 "나한테 고맙다는 생각은 했어?"

 ", 고마워. 그러니까 울지 마."

나는 뻘겋게 변한 여자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코까지 완전히 막혀있어 여자는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었다.

 "나를 괴롭히지 마. 거짓말은 싫어."

여자는 도리질하더니 겨우 그렇게 말했다.

 “무슨 소리야. 어서 자.”

중얼거리며 나는 다시 한번 여자의 얼굴을 닦았다. 거실로 나와 원고용지를 들여다보았지만 눈이 침침해서 내가 쓴 글자조차 알아 볼 수가 없었다. 침대로 가서 여자를 들여다보았다. 여자는 어느 틈에 잠들어 있었다. 말려 올라간 윗입술 아래 뻐드러진 이 두개가 토끼처럼 튀어나와 있었다. 어찌 보면 귀여운 얼굴이었다. 나는 여자의 얼굴에 붙은 머리카락을 떼어주고 손으로 얼굴을 한번 쓰다듬었다.

  "사랑이 식었나봐. 반찬이 빈약한 걸 보니."

  아침 식탁에는 된장찌개가 올라와 있었다. 내가 웃으면서 텔레비전 광고를 흉내 내자 여자가 쓸쓸하게 웃었다. 나 때문에 통장에 돈이 거의 바닥났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농담 삼아 한말이었다. 내 수중에 넘어 온 돈이 다시 여자의 손으로 넘어가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수도 있었다. 나는 부숭부숭한 여자의 눈두덩을 쳐다보았다.

 "어젯밤에 왜 울었어?"

  내가 얼굴을 바짝 들이대고 말하자 여자가 눈을 내리 깔았다.

 "산다는 게 막막해서..."

 "내가 돈 갖다 준다고 했잖아."

 "그 약속 믿어지지 않아."

여자는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서 말했다.

 "난 약속은 꼭 지키는 놈이야."

여자가 마치 내 속마음을 들여다보려는 듯 내 눈을 빤히 쳐다봤다.

 "그 말 두 번 한 것 알아?"

 "언제?"

 "내 엉덩이에 대고 했잖아."

실은 나도 기억하고 있었다. 나는 여자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만화 작업해서 돈 가져오라고 해서 나 밉지? 조금만 하다보면 길이 있을 거야. 솔직히 문호씨가 소설이 아닌 만화를 만들고 있다는 게 나도 싫어."

 "고마워 잘할게."

마지막까지 그렇게 말 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목욕탕에 다녀오겠다는 말을 하고서 일어섰다다음날 오전 12시 비행기를 타려면 가야했지만 말이 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사우나 하는데 시간 좀 걸릴 거야."

20여분 만에 돌아오자 여자가 뜨악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서울 가야겠어. 원고 덜 되었어도 가져오라네. 낼이면 돈이 좀 될 것 같아."

 “그래?”

여자가 눈을 크게 뜨면서 나를 쳐다봤다.

 “돈 많이 갖다 줄게.”

 "얼마나?"

나는 순박한 웃음이 담긴 여자의 얼굴을 바라보다 시선을 잠깐 내렸다.

 "이백 만원은 꼭 갖다 줄 거야."

 "그렇게나 많이?"

다시 쳐다보니 얼굴은 여전히 웃고 있었지만 눈동자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아마 돈을 가져다준다는 말에 눈물이 밀려나온 것 같았다. 무슨 생각을 하다가도 금방 눈물을 흘리는 특이한 여자였다. 나는 물건을 챙기기 위해서 안방과 건넌방을 오락가락했다. 여자는 거실에 서서 나를 쳐다보기만 했다.

  “곧 올텐데, 뭘 다 가지고 가?”

  “아들 녀석 비위 맞추려면 며칠 걸릴 수도 있어. 내일은 우선 돈만 부치게 될 거야.”

여자는 무슨 생각을 하는 것처럼 눈을 깜빡거렸다. 여자에게 팬티를 달라고 하자 여자가 두 장을 가져왔다. 낡은 것은 가방에 넣고 세로줄 무늬가 있는 새것으로 갈아입었다. 여자가 벗어놓은 팬티를 재빨리 집어 들었다.

 “이건 놓고 가. 빨아 놓을게.”

 “며칠동안 입어서 지저분한데...”

 “괜찮아.”

  나는 그 동안 세수만 했다. 그러니까 팬티는 일주일 가까이 입은 셈이었다. 의자에 앉아 있던 시간이 많아서 팬티의 엉덩이 부분에 누런 이물질이 끼어있었다. 마치 치부를 놓고 가는 것처럼 마음에 걸렸지만 더 이상 우길 수도 없었다.

  가방에 내 원고를 다 챙기는 동안 여자는 입을 다물고 있었다. 여자는 현관문에서 몸을 반만 내밀고 잘 가라는 말을 했다. 여자의 얼굴에 웃음기가 돌고 있었지만 곧 사라졌다. 나는 왼손을 들어 미는 시늉을 해 보이면서 오른손으로는 바퀴 달린 가방의 손잡이를 잡았다. 천천히 걷다가 복도가 구부러지기 직전 문득 돌아봤다. 여자가 멍한 표정으로 문 앞에 서 있었다. 나는 여자를 쳐다보면서 씩 웃어 보였다. 얼굴 높이만큼 올라온 여자의 손이 바람에 흔들리듯 조금 움직였다.

 

                                                                            16

  서울에서의 생활이 그리 길지 않았지만 아주 오랜 시간처럼 느껴졌고 며칠동안 여독에 시달려야했다. 한국에서의 생활은 고통으로만 기억될 것 같았다. 발리가 고향처럼 아늑하게 느껴지는 걸 보면 나는 한국 사람이 아니라 이미 발리 사람이었다.

  다소간의 휴식이 필요했지만 발리에 온 첫날부터 L에게 섹스를 요구했다. 공항까지 나오지 않아 의아하기는 했지만 L은 여전히 아름다운 모습으로 나를 맞았다. 피부가 조금 검어져서 매력이 더해 보였다. 나는 샤워만 하고 L의 몸을 더듬었다. 그날 나는 잠깐 동안 발기 불능처럼 성기가 말을 듣지 않아 섹스를 하는데 다소 어려움이 있었다.

  다음날 풀코스 섹스를 시도했다. L은 기다림에 지쳐서 그런지 열정이 식은 듯 했다. 따라서 풀코스의 섹스는 처음부터 어긋나기 시작했다

  그물 침대는 섹스를 시작하자 그물이 찢어지는 소리를 냈다. 아랫배에 힘을 주는데 내 다리가 벌어진 그물 틈으로 빠졌다. 빠져나간 다리가 덜렁거려서 리듬을 제대로 탈수가 없었고 점점 L과 박자가 엇나가고 있었다. 섹스 도중 L이 눈을 뜨고서 나를 흘겨보았다. 나는 그물 틈에서 다리를 빼고서 엉금엉금 기어 바닥으로 내려왔다. 다소 뻣뻣해져있는 L의 몸을 마사지로 풀어주면서 달래었다. 그러고 나서 한참동안 나는 그물침대를 흔들어야했다. L의 표정이 풀리자 나는 L의 알몸을 끌어안고 풀장으로 들어갔다.

  욕조에서 L과의 섹스 경험을 살려 풀장 한쪽에 몸을 기대고 섰다. 물이 깊어서 그런지 몸의 밀착이 쉽지 않았다. 가만히 있는데도 수초처럼 몸이 흔들리곤 했다. 겨우 삽입은 되었지만 마치 반항하는 여자와 섹스를 하는 것 같았다. 리듬은커녕 몸을 밀어 넣는 일조차 여의치 않았다. 게다가 미끈거려서 아무 재미가 없었다.

  갑자기 L이 격렬하게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눈을 가늘게 떠서 쳐다보니 오르가슴에 가까워지는 표정이었다. 나도 호흡이 가빠지기 시작했다. 마지막 호흡을 가다듬고 있는데 내 성기가 갑자기 장소를 이탈했다. 눈을 감고 있던 L이 연체동물처럼 내 몸에 달라붙었다. 내 성기는 본래의 장소를 찾아 헤매다가 사정이 되어버렸다. 정액이 플랑크톤처럼 흩어지자 L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이씨...물만 더럽혔네.”

  L의 짜증 섞인 소리를 뒤로하고 나는 잠수를 했다. 물에서 빠져 나오는데 두 다리가 후들거리는 느낌이었다. 그때서야 내 나이가 마흔 중반이 다 되었다는 생각을 했다.

  어쩌면 그 동안 무리한 섹스를 해왔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L과 이년동안 못해도 이틀에 한번은 섹스를 나누고 살았으니까. 게다가 사흘 째 되던 날에는 조금 불쾌한 일이 있었다. 이년동안 섹스를 하면서 지내왔어도 나는 L의 모든 것을 알고 있었던 게 아니었다. 겨드랑이 털 사이에 있던 조그마한 흉이었다.

 "? 양쪽에 똑같은 흉이 있네."

  애무를 하던 내가 겨드랑이를 쳐다보면서 무심코 던진 말이었다.

  "이거? 유방을 조금 키웠어. 아직 몰랐어?"

  당당하게 말해서 어이없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조용히 넘어가야 했다.

  "... 예뻐졌으니 된 거지 뭐."

  젖가슴을 애무하면서 나는 방부제를 너무 많이 넣어 몇 달이 지나도 모양이 그대로이던 빵을 떠올렸다. 여자가 늙어 쭈글쭈글한데 젖가슴이 이십대 그대로라면 끔찍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섹스를 할 때마다 떠올렸다. 더 이상 L과의 섹스가 환상을 가져다주진 못했다.

  닷새가 지나고 나니까 L은 생리가 시작되었다. 생리 때에도 원할 때가 많았지만 L은 나흘 동안 내게서 등을 돌리고 잤다. L이 몸을 뒤척일 때 생리혈에서 나는 듯 비릿한 냄새가 풍겨 나도 L의 반대 방향으로 얼굴을 돌리곤 했다.

  간혹 집 전화벨이 울리면 L의 표정이 밝아지는 게 언뜻 눈에 띄었다. 내가 인도네시아어를 잘 알아듣진 못했지만 다른 냄새를 풍겼다. 적어도 통화를 하는 사람이 동성은 아닌 것 같았다. L과 사이에 이상한 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때로 L은 핑계를 대고 건넌방에서 자곤 했지만 나도 만류하지 못했다. L과 나는 그런 식으로 틈이 벌어지고 있었다.

  만화도 무협도 손을 대지 못하는 상태로 시간만 흘렀다. 벌써 발리에 온지 한 달이 지나고 있었다. 두어 달 살 돈은 마련되어 있었지만 지금부터라도 글을 시작해야만 했다. 나는 글이 써지지 않자 사이버 공간을 들락거렸다. 거의 각방을 쓰고 있었기 때문에 L은 상관하지 않았다. 여자를 만났던 공간이어서 나는 다른 아이디를 만들어 접속을 했다. 접속했을 때 벽장 속의 여자라는 별명도 더 이상 그 공간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여자의 홈페이지 주소를 알고 있었지만 차마 들어가 보지 못했다.

 "늙은 년이랑 제법 정이 들었나보군."

  내가 사이버 공간에 들락거리는 것을 빗대어 하는 말이었다. 말다툼을 할 때면 L은 꼭 여자 얘기를 끄집어내곤 했다.

 "말조심해라. 그래도 도움을 받은 사람이야."

  그날은 나도 참고 싶지  않았다. 밥을 뜨려다가 숟가락을 놓으면서 나는 언성을 높였다. 하녀를 내 보낸 후 L이 식사준비를 하게 되면서 밥상 앞에서 자주 다툼이 일곤 했다.

 "도움? 지가 좋아서 쓰라고 준 돈이잖아!"

  L은 밥 위에 놓여있던 젓가락을 아예 치웠다. 밥을 그만 먹겠다는 뜻 같았다.

 "?"

  나는 벌떡 일어났다. L도 밥상을 밀어내면서 일어났다. 나는 L의 옷자락을 움켜쥐었다가 뿌리치듯 놓고 돌아섰다. L이 밥상을 차는지 와그르르 소리가 났지만 개의치 않고 밖으로 나와 버렸다.

  무작정 가출을 했던 옛날처럼 갈 데가 없었다. 시장을 한바퀴 돌고 바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오후 내내 나는 바닷가에 앉아 있었다. 해가 포물선을 그리듯 서쪽으로 기우는 것을 몇 분 간격으로 쳐다보곤 했다. 바람이 서늘해지면서 바다 쪽으로 기울던 해가 점점 커지더니 몇 분 사이에 바다로 풍덩 빠졌다. 어둑어둑해지자 시커먼 물살이 나를 덮칠 듯 밀려왔다가 천천히 밀려가고는 했다. 나는 동그랗게 몸을 말은 채 눈을 감았다. 한참 후 눈을 뜨자 진저리쳐질 만큼 새까만 어둠 속에 갇혀있었다.

 

                                                                            17

  며칠 째 집에서 뒹굴고 있었다. 거실바닥에는 개미들이 떼 지어 다녔다. 청소기로 줄을 지어 다니는 개미떼를 밀어버리기도 했지만 돌아서면 눈에 띄었다. 집에 확 불이라도 싸질러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나는 소파에 앉아 담배를 피워 물었다. 한국에서 사왔던 담배가 바닥이 나서 비싼 말보로를 피워야했다. 천장에서 흔들거리던 거미줄이 떨어져 팔에 감겼다. 오랫동안 그 자리에 매달려있어 먼지 때문에 털실처럼 굵어진 줄이었다. 거미줄을 털어 내면서 이제 우기가 시작되는구나하고 중얼거렸다.

  건기와는 달리 우기에는 잡념에 시달리곤 했다. 우기에는 차를 타고 드라이브를 자주 나다녀 기사가 불만이 많아지는 시간이기도 했다. 물이 고인 비포장도로를 달리다 오면 차는 황톳물에 범벅이 되어 있었다. 기사는 검은 얼굴을 구기면서 거친 행동으로 차를 닦았다. 기사를 내 보냈으니 그런 꼴을 보지 않아도 되었지만 그보다 이번 우기에는 꼼짝없이 갇혀 지내야할 상황이었다. 나는 며칠간 무기력 상태였다.

  "물 좀 갖다 줄래?"

  외출하고 들어와서 옷을 벗던 L의 등을 보면서 말했다. L의 등에 흰줄이 엑스자로 표시되어 있었다. 옷 하나를 벗었는데 L의 몸에는 달랑 팬티 하나만 남았다. L은 옷을 둘둘 말아 빨래 바구니에 넣고 냉장고 앞으로 갔다. 물병을 꺼내 들고 오는데 L의 젖가슴이 출렁거렸다. 나는 거만하게 솟아오른 두개의 유방을 외면했다. L도 나를 쳐다보지 않았다.

   "여보세요?"

  전화벨이 울리자 L이 받았다. L은 나를 힐끗 돌아보더니 내가 듣기에는 생소한 인도네시아어를 썼다. 나는 일부러 소파에 비스듬히 누워 눈을 감았다. 전화기를 들고 줄이 팽팽해지도록 나와 반대 방향으로 걸어가서 통화를 하던 L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나는 소파에서 자세를 바꿔 팔을 축 늘어뜨렸다.

  새벽녘에 나는 사이버 채팅 공간으로 들어갔다. 문학방에 들어가 언쟁을 벌이다가 나와서 조금 난잡한 제목이 빼곡히 들이차 있는 공간을 비집고 들어갔다. 들어가자 여자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인사를 했다. 여자의 아이디는 밤이슬이었다.

  "안녕하세요?"

  "밤이슬이라...별명이 예쁘군요."

  “그런가요? 각자 자기소개를 하기로 하죠.”

  “그러죠.”

  밤이슬은 타자가 빠른 편이었다. 내가 사용자 정보를 클릭해서 공간에 올렸다.

  “예술가시네요.”

  “...아닙니다. 무직인데 멋져 보이려고요.”

  “ㅋㅋ

  밤이슬의 캐릭터가 올라온 글자와 함께 웃었다. 밤이슬의 사용자 정보창도 올라왔다. 사용자 정보창의 캐릭터는 미니스커트 차림에 긴 생머리였다

 “이 방을 찾아오시느라 밤 이슬에 젖으셨죠?"

밤이슬이라는 별명에 의미를 두라는 내용이었다.

 "저는 이슬에 젖은 것보다는 밤이 깊어서 외롭다는 걸 말씀드리고 싶군요."

나는 어깨를 으쓱 올리면서 자판을 두들겼다.

 "좀더 깊이 들어가면 외롭지 않을 텐데요?"

묘한 뉘앙스가 풍기는 언어였다. 밤이슬이라는 여자는 이런 종류의 대화에 익숙한 것 같았다. 밤이슬에게서 섹스에 대한 갈망이 느껴졌다. 나는 바지의 자크를 내리고 팬티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깊이 들어가도 외롭네요."

  나는 바지에서 손을 빼 10개의 글자를 조립해서 엔터 키를 눌렀다. 독수리 타법이라 그 동안 내 성기는 기운을 잃어가고 있었다.

 "박는 기술이 시원찮은가 봐요. ㅎㅎ."

  밤이슬의 그 말에 혐오감이 일면서 호기심이 싹 사라졌다.

 "이슬님 죄송. 아내가 화장실에 가려는지 일어났어요. , 나갑니다."

  쫓기듯 그 방을 나와 버렸다. 컴퓨터 앞에서 멍하니 앉아 있다보니 창이 검게 변했다

 한참 앉아 있던 나는 마우스를 움직여 검은 장막을 밀어냈다. 천천히 여자의 영문 홈페이지 주소를 주소 창에 찍었다.

  게시판에는 새로운 글들이 많이 올라와 있었다. 여자는 컴퓨터를 켜면 버릇처럼 게시판에 들어와 살피곤 했다. 여자는 늘 미소를 머금고 게시글을 읽었지만 만지면 쓸쓸함이 분필 가루처럼 묻어 날 것 같은 꼬리글을 달곤 했다. 게시글을 읽고 나서 나는 홈페이지 창 위쪽에 붙은 제목을 따라 차례차례 클릭을 했다.

 장편소설이 하나 실려 있었다. 여자는 습작 중이긴 했지만 마무리를 못해 그 동안 장편을 홈에 올리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소설을 읽었다. '나는 신기루를 보았을 뿐이다.' 라는 마지막 문장은 그 소설의 제목이기도 했다. 나는 컴퓨터를 껐다.

  밖으로 나왔다. 폭풍전야처럼 고요함이 엄습했다. 하루 이틀 새에 우기가 시작되겠지만 서쪽하늘에 있는 보름달이 유난히 밝았다. 걷다가 멈춰선 나는 달빛이 스며들어 푸른 기운이 감도는 정원을 둘러보았다. 가로등 가까이 서 있는 야자수는 풀장을 뒤덮을 만큼 커다란 그림자를 떨어뜨리고 있었다. 소름이 돋아날 만큼 달빛이 차갑게 느껴졌다. 어깨를 문지르던 나는 야자수와 그림자를 번갈아 보며 소설의 마지막 문장을 중얼거리듯 뱉어내었다.

  ‘나는 신기루를 보았을 뿐이다.’

  내 그림자는 서울역 광장에서 잠이 든 노숙자처럼 어깨가 축 늘어져있었다. 그림자를 따라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먼 곳에서 바람 소리가 났다. 양손으로 팔을 붙잡고 있던 나는 집으로 들어가기 위해 몸의 방향을 틀었다. 잠깐 사이 모래 바람이 일면서 나뭇가지와 잎이 거친 파도소리를 냈다.

  나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주저앉았다. 바람이 멎자 얼굴에서 손을 떼고 감았던 눈을 떴다. 눈앞에 펼쳐진 야경이 처음 마주친 세상처럼 낯설었다내가 마치 아득한 공간에 내던져진 것 같았다달빛이 소나기처럼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끝





 

 

김은숙   2018-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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