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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령작가 (3)


                        


  



                                                                          4

  여자는 충분히 나를 거절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하지 못했던 것은 긴 나날을 외로움에 젖어 살았기 때문이 아닐까. 홈페이지를 갖고 있어 사이버 공간에서 팬들과 교류를 하는 여자에게는 꼭 필요한 한 남자가 없었던 것 같았다. 여자는 위로 받을 수 있는 남자를 구하지 못해 때론 부나비처럼 사이버 공간을 헤맸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떻게 보면 어리석은 발상이었다.

  사이버 공간은 나처럼 아차 하면 노숙자가 될 수밖에 없는 남자들이 목적을 위해 진을 치고 있었다. 물론 정상인들도 있겠지만 제대로 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채팅방에 상주할 리는 없었다. 많은 남자들이 기회포착을 위해 들락거린다는 것을 여자는 간과 한 것 같았다. 아니 여자는 알면서도 본인의 말처럼 바깥세상과의 단절 때문에 그랬던 것일까.

  그녀의 별명 벽장 속의 여자는 그 의미를 포함한다고 볼 수 있었다. 처음 여자의 집에 갔을 때 집이 좁진 않았지만 벽장처럼 어둡고 답답한 느낌을 받았다. 계단이 지저분하고 볕이 잘 안 드는 빌라여서 그런 생각을 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베란다의 유리창 앞쪽으로는 빨랫줄로 사용해도 될만한 거리에 전선줄이 지나고 있었다. 영화에서처럼 사다리만 걸치면 이웃 건물과 왕래가 가능해 보이는 비좁은 거리였다.

  베란다에 빨간 플라스틱 통과 서랍장이 놓여있어 거실까지 음침한 그늘을 만들고 있는 것 같았다. 분위기로 봐서 여자가 컴퓨터를 잘 다룬다는 것이야말로 특이한 케이스라 할 수 있었다. 오늘은 그 집에 도착하면 예의상 소설 한편을 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칭찬을 해 주는 것 또한 중요한 일일 것이다. 떠올리다 보니 여러모로 탐탁지 않은 여자였다.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여자는 싼 집을 얻느라 지방으로 이사를 했다는 말을 했다. 28평 아파트에서 가져온 물건을 23평 빌라에 집어넣다 보니 집이 비좁은 골목길 되어 버렸다고 하소연하듯 말했다. 여자는 세 놓은 아파트의 전세와 지금 사는 집 전세금의 차액으로 생활하고 있었다. 간혹 여자는 여성회관에서 소개해주는 가정집 청소나 식당의 설거지 등 잡일을 했다.

"실은 아이들을 가르치려고 했거든요."

고등학교 중퇴인 여자가 아이를 가르친다는 것은 억지일 수도 있었다. 여자에게 독서 지도사 자격증은 있었지만 학부모들이 원하는 것은 대학 졸업장이었다. 게다가 오십을 바라보는 나이라는 걸 여자는 잊고 있는 것 같았다.

"학부모들이 까다로워서 아마 쉽지 않을 거예요."

"아무도 연락을 안 하더군요. 아파트에 붙인 전화번호는 떼어갔던데..."

  나는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건 필요한 사람이 가져간 게 아니라 애들 장난일 가능성이 높았다. 여자는 어색한 웃음을 띤 얼굴로 청소 일에 대한 얘기를 시작했다. ‘이물질이 이끼처럼 낀...’ 이라고 변기의 상태를 묘사하듯 말했다. 락스를 뿌린 변기를 들여다보며 문지르는 여자가 상상이 되면서 합리적이라 할 수 있는 L이 떠올랐다.

  하녀가 있어 L은 화장실 청소는 할 필요가 없었다. L은 손에 물을 거의 묻히지는 않았지만 하녀가 꼼꼼하게 뒤처리를 하도록 다룰 줄을 알았다. 하녀의 행동은 복종에 가까웠다. 초기에 하녀는 투덜대다가 L에게 호되게 당했었다. L이 인도네시아어를 제대로 구사하진 못했어도 이미 귀가 트여있는 줄 하녀는 몰랐던 것이다. 하녀가 대학물을 먹었기 때문에 나름대로 머리를 굴린 결과였겠지만 그건 L에 대한 판단미스라고도 할 수 있었다.

  나는 외출을 할 때 화장을 하는 L을 오랜 시간동안 지켜보곤 했다. 성형을 해서 조금 부자연스러운 눈은 적당한 길이의 인조 속눈썹을 붙이면 아주 자연스러운 쌍꺼풀이 되었다. 고용된 기사는 L의 까맣고 긴 머리칼을 보면서 뷰티풀이라는 감탄사를 연발하곤 했다. 하지만 기사가 쳐다보는 곳은 L의 하얀 목덜미와 풍선처럼 둥글게 부풀은 젖가슴이었다. 형편이 좋지 않아 기사를 내 보냈다는 건 L에게는 안된 일이었지만 내겐 다행일 수 있었다. 가끔 한국에 들어 올 때면 키가 훤칠한 기사의 검붉은 입술을 떠올리면서 신경을 쓰곤 했었으니까.

  발리는 일년이 거의 같은 계절이니 지루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바다를 좋아하는 내겐 그건 아무런 문제도 아니었다. 바다는 노출의 부족에서 오는 다소 어둡고 진한 빛깔의 사진처럼 짙푸르렀다같은 빛깔을 유지 한다면  바닷물을 여러가지 모양의 유리그릇에 담아 집안 곳곳에 두고 싶은 마음이었다.

바다에서 돌아오는 오는 길에 재래시장에 들리곤 했다. 소쿠리에 물건을 담아놓고 그 사이에 쪼그리고 앉아 사람들을 부르는 상인들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한국의 재래장터와 흡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매번 누런 이가 듬성듬성한 노인들과 물건을 흥정하곤 했다. 열대과일이나 다양한 꽃, 무늬가 현란한 옷이 주류를 이루고 있어 장터가 마치 총천연색의 집합소 같았다나는 L을 위해  꽃다발을 한아름씩 사오곤 했다.

  낮엔 덥기 때문에 음식을 해먹고 음악을 듣던가 아니라면 잠을 잤다. 저녁 무렵부터 선선해져서 콘티 작업에 들어가기 딱 알맞았다. 밤중에서 새벽은 항상 가을밤 같았다. 다만 우기에는 끈적거림이 있긴 했지만 나는 비를 좋아하기 때문에 오히려 우기가 기다려질 정도였다. 게다가 비 오는 날 승용차 안에서의 섹스는 환상적이었다. 어슴푸레해질 무렵 정원의 한쪽에 차를 세워놓고 나와 L은 섹스를 즐기곤 했다.

  OFF 버튼을 눌러 유리창의 틈을 조금 벌려 놓고서 L의 옷을 하나씩 벗기면 첫 키스 때처럼 가슴이 두근거렸다. 승용차 지붕을 두들기는 빗방울 소리가 섹스에 몰입을 하게끔 도와주는 것 같았다. L은 섹스를 시작할 때는 비교적 조용했지만 절정의 순간에는 고양이 소리처럼 옥타브가 올라가곤 했다. L이 내지르는 소리는 공간이 좁아 더 확대되는 것 같았다. 나는 잠시 야생동물과의 교접을 하는 듯한 착각에 빠지기도 했다. 아마 우리는 우기의 절반은 밖에 나가 주린 짐승처럼 섹스를 했을 것이다.

  차안에서의 섹스가 지루하게 느껴질 무렵부터는 모래 위에 비닐 천을 펼쳐놓고 비를 맞아가면서 섹스를 했다. 그것이야말로 별미였다. 등이 따끔거릴 정도로 세차게 비가 쏟아지면 온몸으로 섹스를 한다는 착각에 빠지기도 했다. 나는 서울에 온 후 빗속에서의 섹스를 가장 그리워했다. 얼마 전에는 섹스에 대한 갈망 때문에 비 오는 날 우산도 없이 쏘다니다 어둑어둑해서야 집으로 들어갔었다.

  물론 낭비벽이 없었다면 계획에 차질도 없었을 것이다. L과 나는 정기적으로 한인들을 만나서 파티를 즐기곤 했고 때론 슬롯머신을 하기 위해 클럽에 가곤 했다. 많은 돈을 잃어버리면 그 동안 쌓인 울분을 털어 내는 것처럼 후련하기까지 했다. 전처와 결혼 할 무렵 그러니까 정확히 16년 전 나는 생활을 위해 만화를 시작했었다. 결혼이란 새로운 출발의 의미였고, 또한  가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돈을 벌어야만했기 때문이었다.

  소설을 쓰던 사람이 만화에 쉽게 적응할 수 있는 건 아니었지만 내겐 전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당시 출판사에 약 두어 권 분량의 콘티작업을 해서 보냈더니 당장 오케이였다. 만화를 시작할 무렵 나는 돈을 좀 모으게 되면 소설을 시작하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하지만 나는 만화에서 벗어 날 수가 없었다. 만화의 스토리 만들기는 내겐 전혀 어려운 작업이 아니었고, 그 분량만큼 내 손에 쥐어지는 돈이 때문이었다허나 내 곁에 머물러 주지 않는 것도 돈이었다.

  아내와 이혼할 무렵 만화로는 전성기라고 할 수 있었는데 그때도 나는 벌면 쓰기 바빴다. 그 무렵엔 파리 떼처럼 사람들이 꼬이기도 했다. 골방을 가득 메운 담배와 사람들의 열기, 그곳에서의 도박은 내 의식을 몽롱하게 했던 것 같았다. 어쩌면 탕진하는 생활이 내게 희열을 가져다주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물론 지금도 만화를 만들지 않는다면 이어나갈 수 없는 게 내 생활이니 희망이 없는 삶이나 마찬가지였다. 소설을 쓰는 여자를 만나다보니 한편 소설에 대한 생각이 더욱 간절해지는 것 같았다.

  상상에 빠져있다보니 시외버스 안이라는 생각도 잊고 있었다.  생각해보니 나를 거절하지 못한 여자가 좀 의아하기는 했다. 재산 정도로 보아서 여자는 맞선이라도 본다면 안정된 남자를 찾을 수도 있는 조건이었다. 조급증이 있는 데다 융통성이 없어 고집스러워 보이긴 했지만 자신의 신체에 관한 단점을 얘기하면서도 상대를 유쾌하게 하는 유머감각 때문에 여자의 성격이 부드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이틀 전 통화에서는 갑자기 하마가 등장했었다.

 "뼈대 굵은 집안 딸이다 보니 처녀에게 하마라는 별명을 붙여주더라고요."

통뼈처럼 보이긴 했지만 하마가 연상될 정도는 아니어서 나는 껄껄 웃었다.

 "하마야 잡식성도 아니고 육식성은 더더욱 아니니 순하다는 표현이 아니었을까요?"

 "내가 수영은 못하는 데다 쓸모없이 몸집만 커서 그런 별명을 붙여줬을 거예요. 물속에서 사는 동물 중에 하마만 수영을 못한다나? 어쩌면 어리석은 동물이겠지요. 물에서 사는 동물들에겐 수영이 필수니까요."

 "어떤 동물이든 상황에 적응해가면서 사니 하마를 어리석다고만 말 할 수도 없겠지요."

  "그런가요?"

  여자가 조금 웃었다 .

  "입이 하마처럼 크지 않아 억울하긴 했지만 나는 그 별명이 싫진 않았어요."

  "왜요?"

  "그 별명을 얻은 얼마 후 하마가 사육사의 팔을 물어뜯은 사건이 발생했거든요."

  "! 그런 일이 있었어요성질이 무서운 하마였나보다."

  "그 당시 관람객이 하마에게 돌을 던져 약을 올렸다는 것 같았어요."

  "오호...그렇다면 선배님도 화가 나면 무서운 분이란 말씀이죠? 저도 조심하겠습니다."

  내 말에 여자가 한참동안 웃었다. 사람이란 나이가 들면 그만큼 세상 물을 먹어 영악해지기 마련이었지만 아무리 봐도 여자는 어수룩한 느낌이었다. 여자의 웃음소리와 동그란 얼굴이 떠오르자 나는 담배를 물었다가 빼냈다. 버스 안에서는 금연이었다.

 버스는 이제 강을 끼고 달리고 있었다. 피서객들이 강가에 쳐놓은 여러 가지 빛깔의 텐트가 얼룩덜룩 창을 스쳐 지났다. 강에 반쯤 몸을 담근 애들이 암록빛을 흐려놓고 있었다. 마음은 복잡했어도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내 눈은 J시로 가는 길 주변을 샅샅이 훑고 있었다.

여자가 글을 쓰기 위해 머문다는 J시는 주변에 아름다운 강이 많아 제법 수려한 곳이었다. 어설픈 작가에게 J시는, 글을 핑계 삼아 유유자적하기에 딱 알맞은 고장이었다.

 

                                                               5

  터미널에서 나는 묵직한 짐을 택시에 실었다. 많은 원고를 가져올 필요는 없었지만 여자에게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여자가 내 실력을 알아야 했기 때문에 이십대 때 써 두었던 시까지 함께 가져 왔었다. 내 원고에 흠뻑 빠지는 건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여자는 소설에 대한 시각은 객관화되어 있겠지만 시를 공부한 적이 없기 때문에 제대로 판단할 리가 없었다.

동아리 활동을 할 때는 상당수의 멤버들은 나에 대해 열등의식을 갖기도 했다. 이십대 초반에 등단을 하면서 오히려 시를 등한시했던 건 소설에 승부를 걸어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원고 같은 중요한 물건들을 여자의 집에 당분간 놓아둘 필요가 있었다. 집에서 출발하기 전 전화를 했을 때 수화기 속의 여자는 수다스러움이 다소 가셔있어 신중할 필요가 있었다. 내가 무작정 쳐들어가니 여자로서도 고민될 거라는 짐작은 갔다. 택시는 오 분이 채 안되어 회색빛의 빌라 앞에 섰다.

택시 기사는 뒤 짐칸에서 짐을 내리는 내 얼굴을 백미러를 통해 흘끔거렸다. 모자 아래쪽으로 흘러내린 긴 머리칼이 눈에 거슬렀던 것 같았다. 여자들은 내 긴 머리에 호감을 갖곤 했지만 남자들은 건달 취급을 하기도 했다. 그들의 생각이 맞을 수도 있었다. 몇 달 동안 내 손에 쥐어진 원고료는 얼마 되지 않았고 빚에 시달려 숨이 막힐 정도였으니까. 나는 바퀴가 달린 가방을 들고 계단을 비척비척 올라 사층까지 갔다.

  현관문을 열어주던 젖은 머리의 여자가 나를 보며 함빡 웃었다. 자세히 보니 죽은 깨가 양볼 위쪽에 작은 씨앗처럼 박혀 있었다. 웃음기 때문인지 그늘져 보이는 얼굴은 아니었다. 무모한 결정을 하기엔 많은 고민도 했겠지만 그런 흔적은 없었다. 집으로 들어가자 나는 챙겨온 반바지로 갈아입었다. 식탁 의자에 앉아 물로 목을 축인 다음 나는 가방에서 시가 인쇄된 에이포 용지를 꺼냈다.

"이게 십대 후반과 이십대 초반에 썼던 시랍니다."

"꽤 많네요."

"집에 더 있어요."

  고개를 끄덕거리던 여자가 한 장 한 장 읽었다.

"그러니까 이게 82년도 작품이에요? 어쩌면 이런 생각을 할 수가 있지? 나는 그때 철도 안 들었던 것 같은데요."

  고등학교 일학년 때부터 나는 학교에서 천재시인으로 통했었다. 간혹 가출을 하는 버릇만 없었다면 모범생이랄 수 있었다. 학교를 오갈 때 나는 늘 발끝만 내려다보고 걷는 습관이 있어 누가 봐도 얌전한 모습이었다. 가출했다 돌아올 때마다 학교에서 나를 받아주었던 이유는 천재에 대한 배려였고 소위 삼류에 속하는 학교였기 때문이었다.

"저도 마찬가지예요. 사는 게 재미없다는 생각이 들어 툭하면 가출을 했거든요."

"가출? 그런 건 꿈도 꾸지 못했구요. 다만 문호씨가 시를 쓰던 시절에 난 공순이었죠."

"공장에 다녔어요?"

"밭매기 싫어 공장에 갔죠. 한 여름에는 해를 등에 짊어지거나 머리에 이고 밭을 매야하는데 그거  죽을 맛이에요. 게다가 운 나쁘면 시골 총각에게 시집 갈 수도 있고..."

  "그 시절 학교 다녔던 사람들 보다는 글을 잘 쓰실 것 같은데요. 특히 소설은 경험으로 쓰는 거라서..."

  "글쎄..."

  여자가 말끝을 흐리긴 했지만 표정엔 별 변화가 없었다. 문득 어수룩한 소설 쓰기가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시를 잘 모르긴 하지만 아주 잘 썼다는 생각이 들어요."

  말을 하면서도 여자는 시를 계속 들여다보고 있었다. 나는 샤워를 하기 위해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날 새벽에 드셔야 할 해장국을 오늘 끓였네요."

  여자는 탁자에 시가 인쇄 되어있는 에이포 용지를 놔둔 채 반찬을 늘어놓고 있었다. 나는 탁자 가장자리로 종이를 밀었다. 내 손을 따라오던 여자의 시선이 방향을 바꿔 내 얼굴에 닿았다.

 "아무거나 있는 대로 먹어도 되는데...성찬입니다."

  내가 식탁을 둘러보면서 말을 하자 여자가 머리를 저었다.

 "아니에요. 제가 안주 만드는 걸 좋아해서 낙지볶음을 했구요. 이건 부추를 넣어 끓인 올갱이국이 에요. 해장국으로는 그만이지요."

 "올갱이?"

 "다슬기 말예요."

 "아! 다슬기."

 "안 좋은 기억으라도 있으세요?"

내가 젓가락으로 다슬기를 집어 들여다보자 여자가 물었다. 

 "아닙니다. 그럼 묵혔던 숙취를 해결해 보도록 하죠. 하하..."

 ", 별로 술은 안 드시던데. 오늘도 그저 반주나 하세요. 제가 대신 마실게요."

  “좋죠."

  나는 위장이 좋지 않아서 발리에서 나오자마자 약을 계속 먹고 있었다. 약국에서 일년 정도 복용하길 권해서 거의 반년 분량을 미리 조제해 놓은 상태였다. 요즘에 신경 쓰는 일이 많아 위경련까지 종종 찾아오곤 했다. 술을 먹어서는 안 될 상태이지만 오늘만큼은 여자의 기분을 맞춰줄 필요가 있었다. 물론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야했다. 내가 갖고 있는 여자에 대한 감정을 애정이 아닌 동료의식 정도로 해둘 필요가 있었다. 아니 여자가 그렇게 알고 있어야만 했다. 요즘에는 애정 없이 섹스를 하는 커플이 많기 때문에 그다지 어려울 것도 없었다.

"여기 온 것은 마음의 끌림이긴 해도 아직 사랑이라는 느낌은 아니구요."

내가 머뭇거리면서 그 말을 꺼내자 여자의 미간이 찌푸려지더니 시선이 베란다 창 쪽으로 옮겨갔다. 여자의 얼굴은 잠깐 동안 어스름이 스며드는 바깥 풍경처럼 어두워졌다.

"사랑? 글쎄요... 문호씨가 온다 했을 때 나도 막지 않았어요. 아이러니 하지만..."

어리석게도 여자는 늪 앞에 발이 다가가 있는지도 모르고 한 걸음을 더 떼고 있었다. 여자는 흐려졌던 얼굴을 이내 폈다. 여자의 속내야 어떻든 관계없었다. 최종적인 책임을 회피할 수 있도록 상황을 만들기만 하면 되는 거니까. 여자의 얼굴을 살피듯 바라보다가 다시 입을 떼었다.

 "제 만화 어떻든가요?"

 "만화요? 아직..."

  여자가 입에 대었던 소주잔을 도로 내려놓았다.

 "천천히 읽으셔도 되고요."

 "만화란 말 몇 마디면 다음 장으로 넘어 가잖아요. 토막 쳐 놓은 걸 연결해 가며 읽기가 싫거든요. 이상하게도 드라마 극본이나 시나리오도 읽히지 않아요."

  내 작품에 관해 무관심한 것 같아 실망스러웠지만 드러낼 수는 없었다. 나는 약으로도 잘 다스려지지 않는 위장에 대한 생각이 앞서면서도 잔을 들어 소주를 들이켰다.

 "하긴 만화는 십대나 즐겨 읽는 거지요."

  자조 섞인 내 말에 여자가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생각하진 않아요. 아마 글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이라면 절반 가까이는 만화를 좋아할 겁니다. 아직도 무협이나 만화는 인기 유지를 하고 있잖아요."

 "그렇게 볼 수도 있지만 영상매체에 밀려나고 있다고도 볼 수 있어요."

  십오 년 가까운 세월 만화를 써온 나는 그 부분에 있어서 감각이 예민했다. 만화업계도 기업처럼 운영하고 있기 때문에 경기불황에 예외일 수는 없었다.

 "그러니 소설이나 시는 어떻겠어요."

 "인터넷 발달이 문제라고 하죠. 제가 쓰는 무협이나 만화도 인터넷 공간에서 쉽게 접할 수 있죠. 야설이라든가 십대의 수준에 맞춰 쓴 글들이 인터넷 공간의 상당 부분을 잠식하고 있어요. 이런 시대이니 인내를 하며 읽어야할 소설들은 맥을 못 춘다고 봐야죠."

 "쉽고 재미있으면서도 문장이 좋고 내용이 깊은 소설도 얼마든지 있긴 하죠. 그런 소설들이 많은 독자들을 아우를 수 있다고 봅니다. 그렇지만 나처럼 재능이 없는 글쟁이에게는 참으로 어려운 일이죠. 나는 책이 아닌 에이포 용지만 끌어안고 있다 죽을 지도 모르겠네요. 어찌 생각하면 문호씨가 부럽기도 해요. 만화 쪽으로는 정평이 나 있으니까."

 "에이...만화는 만화일 뿐이죠."

 "그래도요. 문호...대문호... 좋은 이름이에요. 실명인가요?"

 "그럼요."

  실은 내가 만든 필명이었다. 아이들이 태어나면 많은 돈을 주고 이름을 짓는 건 이름이 그만큼 중요해서일 것이다. 이름이란 유명한 연주자가 소장한 값나가는 악기와 같은 거라고 나는 늘 생각하고 있었다. 유령작가로 활동을 했기 때문에 내 필명은 보통사람들이 쓰는 이름과 다를 바가 없었지만 이십대 그 즈음에는 서문호라는 작가의 소설이 서점마다 좍 깔릴 거라 생각했었다. 그때 라이벌 관계였던 친구 중 하나는 문단에 얼굴을 들이밀자마자 주목을 받았기 때문에 그런 생각에 젖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이미 나는 문호라는 이름에 익숙해있었지만 정작 만화계에서는 유령작가였기 때문에 그리 쓸모가 있는 필명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동료 작가들은 내 실명이 문호인줄 알고 있었다. 여자가 계속 문호 어쩌고 하더니 다른 소주병의 뚜껑을 비틀었다.

"그만 마셔요."

  나는 소주병 뚜껑을 닫아 식탁 아래 놓았다. 여자는 아쉬운지 바닥을 내려다 보다 일어나 식탁을 치웠다.

  알코올은 위장의 내용물 중 단 몇 %에 지나지 않겠지만 나이든 여자라는 부담감을 없애기에는 충분했다. 나는 시트만 있는 침대에 여자와 나란히 누웠다. 섹스를 위해 스탠드가 꼭 구비되어야할 이유는 없었지만 형광등 불빛이 너무 밝아서 진료대에 누운 환자처럼 어색한 느낌이었다. 나는 담배를 물고 라이터를 켰다.

 "잠자리에서도 담배를 피워?"

  취기 때문에 혀가 꼬인 목소리로 여자가 내게 물었다. 침대에 함께 누워있기 때문에 쉬이 반말이 나온 것 같았다. 담배를 물었던 것은 어색함을 피하고 싶어서이기도 했지만 저녁 먹은 후 이를 닦지 않은 이유도 포함되어 있었다. 여자는 반바지와 티셔츠를 입은 상태였다. 보수적인 성향이 강해서 벗기려면 갑각류의 껍질처럼 애를 먹을 것 같았다. 다만 저녁에 섭취한 알코올 제법 되어서 스스로 벗을 수 있겠다싶기도 했다.

나는 간혹 꿈속에서도 줄담배를 피는 걸요. 그러니 끊는다는 건 엄두도 못 내고 있어요.

"... 담배는 배우지 말아야겠군."

여자가 중얼거리면서 왼손으로 내 어깨를 쓰다듬었다.

"손에 뭐예요?"

"아니... 아무 것도 아냐."

여자가 왼손을 재빨리 등뒤로 감췄다.

"이리 내봐요."

나는 여자의 왼팔을 잡아챘다. 여자의 손이 순식간에 뒤집혀 손바닥이 드러났다.

"흉터야. 가스렌즈를 짚었지."

여자는 의외로 쉽게 이유를 밝혔다. 흉터는 자잘한 동그라미 형태로 무늬를 이루고 있었다. 밀가루 반죽을 반반하게 펴놓고 붓두껍으로 찍은 것처럼 흉터가 아물어 있었다.

"어쩌다가?"

"후후...사는 게 고통스러워서. 6층에서 내려다보면서 죽기엔 딱 알맞은 높이구나 생각은 늘 했지만 실천에 옮길 수 있어야지. 처참한 모습을 나는 이미 봤거든. 하얀 골수에 붉은 피가 엉겨있고 그 옆에 구경꾼들이 몰려 있었어."

여자는 그 장면을 떠오르는지 턱을 치켜들고서 눈을 위로 치켜 떴다.

"에이...죽는 용기로 살아야한다고 하잖아."

"하긴 그래. 일년에 너덧 번씩 맞고 산다고 죽으면 안 되겠지. 아이들도 있으니까..."

"맞았어요?"

"그럼. 각목으로 맞을 때는 잘못했다고 빌었지. 다섯 대인가 맞은 다음 뒤로 나가떨어지면서 그 남자와 눈이 마주쳤는데 인간의 얼굴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았어. 샛노란 피부에 무표정했고 눈의 흰자위가 빨갛게 달아 있었어. 두 손으로 싹싹 비니까 다음부터 조심하라면서 그만 때리드라고. 그런데 참 우습지. 왜 맞을 때보다 빌고 있을 때 모멸감이 더 할까?"

나는 연기 때문에 다소 흐릿해진 여자의 얼굴을 쳐다봤다.

"대부분 맞는 사람들은 그런 마음이 들죠. 힘이 약한 자가 강한 자에게 맞을 수밖에 없잖아요. 항복하는 게 그 당시 고통을 최소화하는 것이고..."

고개를 끄덕거리던 여자가 내 손에서 담배를 낚아챘다. 나는 나와 만나던 첫날 포장마차에서 여자의 손놀림이 부자연스러웠던 기억이 나서 내 손바닥으로 여자의 왼손바닥을 가만가만 쓸었다. 마구 들이킨 연기가 호흡기와 식도를 구분하지 못했는지 여자가 연기를 토해내면서 캑캑거렸다. 여자의 눈에서 눈물이 줄줄 쏟아졌다.

"태우지도 못하면서..."

  내가 여자의 입술에 물려있는 담배를 뺐다. 이로 물고 있었는지 담배가 부러졌다.

"한 군데 더 볼래? "

  여자가 재떨이에 필터를 뱉더니 웃으면서 이마의 머리를 제쳤다. 다지류처럼 생긴 흉터였다. 오 센티 가까이 될 것 같았다.

"개다리소반에 찍힌 거야. 아프진 않고 피만 콸콸 쏟아졌어. 브래지어 때문에 피가 흘러내리지 못했나봐. 가슴의 복판이 빨갛게 젖었지. 여기 말야."

  여자가 젖가슴 사이에 동그라미를 그렸다.

 "그대로 삼십분만 버티면 죽었을 수도 있는데 살고 싶어서 그 남자를 따라 병원에 갔네. 후후..."

  나는 말없이 담배를 한대 더 물었다.

"가스렌즈 받침대를 치우고 손바닥을 대니까 손에 물이 묻어 있어 지지직 소리가 나더군. 소리보다 오징어 타는 냄새에 비위가 상했어. 그 후부터 나는 오징어는 절대 먹지 않아."

"잊어버려요. 내가 옆에 있잖아."

  내 목에 팔을 두르면서 여자가 씩 웃었다. 웃음에 앞서 밀려나오는 여자의 앞니 두개가 유난히 크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여자의 입에 입술을 대면서 소곤거렸다.

"이크...이를 안 닦은 것 같은데..."

"사포지 같은 내 혀로 당신의 이를 닦아줄게."

  쏙 밀려나오던 혀가 완강하게 다물린 내 입술을 비집고 들어왔다.

"당신의 입에서 나는 담배 냄새는 내겐 향기예요. 박하 향처럼 쌉싸름한 향기..."

  여자가 속삭이면서 두 눈을 감은 채 혀로 칫솔질을 하듯 내 이를 더듬었다. 속눈썹에 느린 속도로 바람이 지나가듯 떨리고 있었다. 나는 여자의 입술에 내 입술을 붙인 채 상체를 눕혔다. 타액이 혀에 의해 섞이면서 달착지근한 맛이 느껴졌다. 여자가 하반신을 밀착해왔다. 길게 내민 개 혓바닥처럼 축 쳐져있던 내 성기가 서너 번 진저리를 치더니 발딱 일어섰다. 내가 팬티를 벗자 여자가 이불을 당기고 그 속에서 속옷을 벗었다. 나는 덮었던 이불을 밀어버리고 여자의 몸 위로 올라갔다. 여자가 억센 팔 다리로 내 몸을 감았다. 마치 내 몸이 함몰되어버릴 것 같은 힘이 느껴졌다.

  여자는 몸을 천천히 움직였고 몇 달 동안 수음으로 견디어 온 나는 허겁지겁 여자를 탐했다. 나는 짐승처럼 본능에 충실한 섹스를 하고 싶었지만 일단 여자와 리듬이 맞지 않았다. 상대가 발리의 L이었으면 하는 잡념까지 꼬여들면서 갑자기 내 성기가 바람 빠지듯 주저앉았다. 느낌이 이상해서 눈을 뜨니 여자가 피식피식 웃고 있었다. 나는 여자를 엎드리게 해 놓고 어깨뼈부터 마사지하듯 손을 놀렸다. 여자의 호흡에 신음소리가 섞이기 시작했다. 천천히 발기가 되었지만 섹스를 시작하자마자 사정이 되어버렸다. 여자는 절정에 오르지 못했음에도 더 이상 보채지 않았다. 나는 등을 돌린 채 잠을 청하던 여자를 끌어당겨 안았다.



 

    

 

김은숙   2018-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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