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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령작가 (4)


       






                                                           6

 "어쩜 그리도 잠을 잘 자? 남의 집인데도 말이지."

  그 소리에 눈을 뜨니 벌써 아침이었다. 말하는 여자의 눈과 내 눈이 마주쳤다.

 "글쎄...선배가 편해서였겠지. 실은 잠자리가 바뀌면 잠을 못 자거든요."

 "거짓말."

  여자가 자르듯이 말했다. 여자의 아마에 브이자로 잡힌 주름을 바라보면서 이불 속으로 손을 넣어 여자의 아랫배를 더듬었다. 머리칼처럼 가느다란 음모가 손에 잡혔다. 여자가 내 손을 밀어내자 귓불에 입술을 댔다. 세수하기 전이라 이미 노화가 진행되는 피부가 그대로 드러났다. 피부 안에서는 벌써 검버섯이 돋아날 준비를 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침대가 널찍해서 푹 잤던 것 같았다. 나는 아들과 싱글 침대를 번갈아 가며  쓰고 있었다. 그나마 내가 밤에 작업을 하기 때문에 아들과 잠자리 문제로 다툼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봐야했다. 얹혀사는 그 집의 내 방은 책상 하나와 침대 하나가 겨우 들어가는 크기였다. 목적만 아니라면 한달 만이라도 푹 쉬다 갔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선배 여기서 좀 묵으면 안 될까?"

  여자가 턱을 끄덕거렸다.

 "그래. 하숙비만 낸다면 얼마든지..."

 "하숙비를 내면 있을 곳이야 여기 말고도 많겠죠."

 "그럼 관두고..."

  싱거운 결론이었다.

"소설 공부 시작한 지가 10년째라면 그때 선배의 나이가 서른여덟쯤?"

"그렇지."

  그 나이에 시작한다는 건 거의 가능성이 없다는 말과도 같았다. 지명도가 있는 모작가가 사십이 넘어 등단하기는 했지만 적어도 이십대에 대학에서 글을 써 보았다거나 중간 중간에 공부를 해서 문장의 노하우라도 있어야 가능한 얘기였다. 십 년 정도는 공부를 해야 제대로 된 소설 쓰기를 할 수 있었다. 그것도 어느 정도 재능이 있는 습작생들의 얘기였다. 게다가 나이가 들어 소설 쓰기를 시작하면 문장이 구태의연함이나 식상함을 벗어나기 어려웠다.

"아직도 문장이 좀 식상하다는 느낌이고 제대로 만든 소설인가 하는 의구심을 늘 갖거든. 물론 동아리 활동을 할 때는 잘난 맛에 쓰기도 했지만..."

  여자가 웃음을 띤 채 얘기를 하면서 내 몸의 여기저기를 쓰다듬었다. 가벼운 마찰만으로도 친밀감이 느껴져 하룻밤을 함께 지낸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어디서 공부를 했어요. 선배?"

"문화센터를 거친 후 작가가 운영하는 전문센터에서 했는데 문화센터는 다니지 않는 게 나을지도 몰라. 다만 내가 맞춤법까지 엉망이어서 처음에는 유명 작가가 운영하는 전문적인 곳엔 갈 엄두도 못 내긴 하였지만."

  나와는 달리 여자는 사실을 사실 그대로 전달하려는 의지가 강한 여자였다. 게다가 감춰야할 부면까지 굳이 드러내려하기 때문에 품격이 낮아 보이는 것 같았다. 며칠 있다보면 나는 여자 가족의 치부까지 다 알게 될 것 같았다. 어쩌면 사고의 미숙함 때문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자 미사여구를 남발해서 소녀티를 벗지 못한 삼류 소설이 떠올랐다. 조금 더 후하게 점수를 준다면 중년의 불륜이나 삼각관계를 다룬 드라마 같은 소설이나 쓰지 않을까 싶었다.

"선배 소설 좀 볼 수 있을까?"

  내키지 않았지만 그렇게 물었다.

"? 문호씨가 봐 주는 거야 영광이지."

  여자가 이불을 걷어내면서 일어났다. 도르르 말린 팬티를 빠른 속도로 꿰어 입고 브래지어도 하지 않은 몸에 웃옷을 걸쳤다. 나는 천천히 일어나 팬티와 티셔츠를 입었다. 거실로 나가자 벌써 프린터 기계에서 인쇄물이 빠져 나오는지 같은 소리가 반복되고 있었다. 나는 인쇄물을 챙기는 여자를 바라보며 소파에 앉았다.

  이십대 때 습작을 하면서 동아리 멤버들의 작품을 대했었다. 젊은 층들의 습작품들은 대부분 자신의 고뇌를 그저 나열해 놓았을 뿐이었고, 나이가 든 여자들은 소설인지 수필인지 자서전인지 통 분간할 수 없게 쓰고 있었다. 품평을 하기 위해 인내를 하면서 읽었던 기억이 떠올라 나는 여자가 컴퓨터에서 인쇄물을 받아 내는 동안 발을 까닥거렸다.

가만히 앉아 있을 뿐이었는데 콧등에 땀방울이 맺혔다. 바깥에서 매미가 빽빽거리다가 멈추곤 했다. 읽는 동안 곤욕을 치러야 한다는 생각에 머릿속까지 뜨거웠다. 어느새 내 오른쪽 다리가 들썩거리고 있었다. 다리를 떨거나 발을 까닥거리는 건 지루함이나 권태로움의 표현이었다.

 ", 읽어봐."

 여자가 몸을 돌려 인쇄물을 내 손에 건네주었다. 읽어 내려가는 순간 등줄기를 훑고 가는 무엇인가에 내 고개는 뻣뻣해지고 있었다. 늘 연필을 쥐고 있어 간혹 쥐가 나는 오른 손의 느낌이 이상해서 손을 쥐락펴락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냉소로 점철된 소설이었다. 일단 나는 담배를 입에 물고 호흡 조절을 했다.

"인상이 왜 그래? 내 소설이 좀 그렇지?"

 "아니... 단지 시점이 조금 불안하고 현재와 과거의 교차점이 매끄럽진 못하지만 잘 쓰셨네."

 내 반응에 긴장했던 여자의 얼굴에 서치라이트가 지나가듯 밝아졌다. 여자는 잇몸까지 드러나 보이도록 웃더니 다시 컴퓨터 쪽을 향했다.

"하나 더 뽑아 줄께. 도대체 난 내 작품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가 없단 말이야."

  연기가 빙 돌아지나는 여자의 머리 뒤쪽에도 흰 머리칼이 제법 많았다. 자신이 쓰는 소설과는 달리 너무도 평범하게 늙어가는 여자였다.

 "다른 거 인쇄했어요?"

  침묵이 부담스럽게 느껴져 다소 큰 소리로 물었다.

 "... 다 되었어. 아마추어 작품을 보려면 지루하고 재미없을 텐데..."

  여자는 중얼거리며 뽑아낸 인쇄물을 가지런하게 맞추느라 용지를 식탁 위에 몇 번이나 들었다가 놓았다. 스테이플러로 찍어주는 원고를 받아서 선 채 읽었다. 가슴이 서늘해지는 서사적 구조의 작품이었다. 여자는 궁금증이 일었는지 읽어가는 동안 컴퓨터 앞 의자를 돌려서 나를 줄곧 쳐다보았다.

"도입부가 너무 길어요. 그리고 상징적 의미인 꽃에 대한 묘사가 너무 자주 나와서 뻔하달까..."

"그래. 그럴 거야. 아무래도 서투르니까."

여자는 실망한 듯 시무룩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니. 서툰 건 아니고...뭐랄까..."

내가 뭔가 설명을 하려고 말을 길게 빼는데 여자가 인쇄되어 나온 다른 원고를 가져왔다.

"잠깐. 이번 거 봐봐."

그대로 가져와서 페이지가 거꾸로 된 원고였다. 원고를 읽는 동안 여자는 의자에서 일어나 어슬렁거렸다.

"이거는요..."

  나는 세 번째 원고를 들여다보면서 말을 꺼내었다. 식탁 귀퉁이의 토끼 모양 장식물에 꽂힌 연필을 집어들었다. 여자가 내 앞으로 바짝 다가왔다. 어제 먹은 술 탓에 여자의 입에서 단내가 났다.

 "상당히 좋은데 몇 군데 손 봐야 해요. 이 부분... 설명 없이 남자가 등장하잖아. 이건 쓸데없는 친절이고."

  내가 설명하는 동안 여자는 긴장하느라 눈도 깜빡이지 않았다. 설명이 끝나고서도 나는 여자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여자의 음주벽으로 보자면 알코올성 지방간 정도는 될 것 같았다. 그런 사람들의 공통점은 거의 눈동자가 누렇고 피부가 거무죽죽했지만 여자는 눈의 흰자위가 깨끗한 편이었고 피부도 맑아 보였다. 여자를 보고 있자니 내가 내세울 수 있는 게 있다면 소설 쓰는 방법일 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나는 연필을 식탁에 놓으며 소파에 등을 붙이고 꼿꼿이 앉았다.

  "앞으로도 공부를 많이 해야겠지?"

  "잘 하시는데요. 프로라 할만한 실력인 걸."

  물론 그 정도의 실력은 아니었지만 아마추어는 결코 아니었다.

  "정말?"

  과장된 내 표현에 여자는 활짝 웃으면서 내 얼굴에 얼굴을 붙였다. 어색해서 나는 상체를 뒤로 젖혀 여자와 간격을 두고서 조목조목 짚어 설명했다. 내가 습작품 위에 따옴표를 찍거나 포물선을 그리는 동안 여자는 계속 눈을 깜박거렸다. 나는 끝 부분의 문장과 대화의 위치를 바꿔주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가슴이 답답해져서 정수기에서 물을 받아 꿀꺽 꿀꺽 마셨다. 내가 만든 수백 권의 만화가 마치 배설물처럼 느껴졌다. 20대 때의 내 재능은 만화 스토리를 만드는 동안 훼손되었을 것만 같았다. 나는 거의 속기라 할 수 있는 스토리 작업에 익숙해져 있었을 뿐만이 아니라 만화란 곧바로 돈이 되는 상품이었다. 그건 내가 소설로 방향을 틀 때 족쇄의 구실을 할 수도 있었다.

  맨 처음 만화책이 나왔을 때 얼마나 뿌듯했던가. 그 당시 내게 쥐어진 돈은 윤택한 생활을 할만한 액수였다. 차츰 나는 소설을 쓰고 시를 쓰던 시절에서 멀어져갔다. 만화 시작한지 삼 년째부터는 신문에 연재된 만화에 찬사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동료 작가들의 부러움과 시샘도 받았다. 하지만 오르막이 있으니 내리막도 있을 수밖에. 화려했던 시절도 잠깐이었다.

과다한 분량의 스토리 작업은 삶을 풍족하게 했지만 글의 질이 나빠지는 역할도 했다. 때로 나는 작가가 아니라 사기꾼이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나마 빚에 내몰리게 되자 마치 추위에 손이 곱아버린 사람처럼 연필조차 잘 안 쥐어졌다. 모든 건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었고 나는 정신적인 공황상태나 마찬가지였다. 몇 달 동안 나는  글을 쓰는 게 아니라 벽 바라다보기를 하는 것 같았다. 때마침 여자를 사이버 공간에서 만났고 돌파구 마련을 위해 짐을 싸들고 이 집으로 들어 온 것이었다.

  "이제 아침 밥 해야지."

  여자가 중얼거리며 밝은 얼굴로 의자에서 일어났다. 나는 과음을 한 것처럼 갑자기 속이 뒤틀렸다. 설사할 조짐이었다. 뱃속을 무엇인가가 빠른 속도로 돌면서 오토바이 시동 소리가 나면 그건 하루 이틀에 나을 병이 아니었다. 내가 먹는 위장병 약은 소화제가 들어 있는데 제 구실을 못하고 있었다. 선천적으로 위장의 조건이 열악한데다가 신경성 위염까지 겹친 상태였다. 배를 문지르다가 소파에서 일어나는데 주방 앞에서 왔다 갔다 하는 여자의 종아리에 얽힌 정맥류가 눈에 띄었다. 여자의 다리가 덩굴에 감긴 고목처럼 보였다. 험악한 종아리와는 달리 여자의 발걸음은 경쾌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여자의 다리를 바라보다가 화장실로 갔다.

 

                                                     7

 "선배,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이라는 책 읽었어요?"

  여자가 내 얼굴을 쳐다보며 눈을 깜빡거렸다.

  "처음 듣는 제목인데?"

  국내에는 그리 알려진 작가가 아니라서 그 책을 생각해 낸 것이었다.

  "그거 세 권짜리 장편인데 읽으면 소설 쓰기에 상당한 도움이 될 거예요."

  1,2,3 권이 각기 다른 이야기랄 수도 있고 같은 이야기랄 수도 있는 장편이었다. 사고의 폭을 넓히기 위해서는 그런 종류의 소설을 접하는 것도 매우 중요했다.

 "앞으로 한 일년 정도 100권 정도의 장편 소설을 읽으시면 상당한 실력의 작가가 될 겁니다."

 "100권씩이나?"

 여자는 벌린 입을 얼른 다물지 못했다.

 "많이 읽으면 그만큼 실력이 좋아지는 거니까. 물론 지금까지의 독서 량도 상당하시겠지만..."

 "아이고 백 권을 언제 다 읽을까."

 "읽으면서 작품을 쓰면 되죠."

 "그래... 집에 책이 구비되어 있는 게 아니니 인터넷이나 큰 서점을 뒤져봐야지."

 ", 없는 책도 있을 거야. 그건 헌 책방에 가 봐요."

  나는 헌 책방을 뒤져서 열댓 권씩 책을 사오기도 했었다. 물론 일반 독자가 아닌 작가지망생이 취할 태도는 아니어서 헌책을 들고 도망치듯 서점을 나오곤 했다.

 "고전은 읽으셨을 테고... 그 후에 쓰인 명작들도 많아요."

  나는 여자가 읽어야할 책을 죽 나열했다. 여자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사십 권 이상이나 되는 제목을 일일이 적었다.

 "문호씨가 내 소설 지도를 좀 해 주라. 어차피 문호씨 형편이 어려우니까 내가 도우면 될 것이고..."

  예상 밖의 말이 여자의 입에서 불쑥 튀어나왔다. 여자가 그만큼 나를 신뢰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내가 얼마나 도움이 되겠어요?"

  나는 피식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아냐. 이제 문호씨도 만화 일은 그만해야지. 소설을 쓰지 못하면 절름발이 인생이 되잖아. 그렇다고 내가 생활비를 다 댈 수는 없겠지만 일부는 댈 수 있어. 문호씨가 벌은 돈은 모아 줄 테니 이삼년 후부터 소설 쓰기를 하는 거야. 어때?"

  어쩌면 좋은 제안이었다. L이 없었다면 울며 겨자 먹기로라도 선택했을까? 아니었다. 찾아보면 이 정도의 조건이 될만한 여자는 많을 것 같았다. 나야 이미 소설을 쓸만한 실력을 갖추고 있으니까 소설 쓰기를 하는 여자가 필요한 건 아니었다. 만화계에서는 알아주는 작가이니 좋은 조건을 가진 여자 만나기가 어려울 것도 없었다. 삶에 찌들려 지낼 땐 내 스스로를 양아치라고 부르기도 했지만 그게 보통 사람의 눈에는 매력으로 보일 수도 있었다. 그거야말로 작가들만이 가질 수 있는 프리미엄이 아닐까싶었다. 다만 불안정한 상태라 여자의 제안이 구속력을 갖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여자의 얼굴에 L의 얼굴이 오버랩 되면서 당장 발리 행 비행기를 타고 싶어졌다.

  발리는 휴양지라서 여행객들이 많았고, 따라서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할 필요가 없었다. 이제 스물일곱인 L과의 16년이라는 나이 차이도 특별한 건 아니었다. 중년의 한국여자들이 동남아시아로 여행을 하는 것은 현지의 젊은 남자들과 섹스를 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속설이 생길 정도로 프리섹스를 즐길 수 있는 곳이기도 했다. 눈치 볼 필요도 없고 체면은 따질 필요가 없으니 발리는 내게 낙원일 수밖에 없었다. 한국에서 만화와 무협의 계약이 잘 이뤄지고 생활이 안정되면 L과 발리에서 조촐하게 결혼식을 올리기로 했었다. 물론 결혼식이란 혼인신고도 포함했다.

  여자와 만나고 있는 지금의 상황을 봐서는 혼인신고가 되어있지 않는 게 차라리 다행이었다. 여자가 원한다면 혼인 신고는 아니더라도 내가 이혼남이라는 증거물을 보여줘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았다. 지금은 내가 꺼낼 말을 여자가 먼저 꺼내어서 고마울 따름이었다.

 "고마워요. 그렇게 생각해 줘서... 실은 선배랑 살게 되면 형식적으로라도 가족이나 친구들을 모아놓고 조촐한 식을 올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 증표로 반지도 마련하고요."

 "아냐. 난 그런 거 필요 없어. 내 호적에는 아무도 올리지 않을 거야. 그저 한 공간에서 서로를 도우며 지내자는 거지."

  여자는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듯 내 말을 곧바로 잘랐다. 내가 바라는 대답에서는 빗나갔지만 오히려 다행이었다. 여자네 집에 오기 전에 L에게 전화를 하면서 그런 말을 꺼내긴 했었다. 재수가 없으면 다른 여자의 호적에 올라갈 수도 있을 거야. 나는 웃고 있었지만 L은 삐졌는지 잠시 말이 없었다. 웬만하면 그런 일은 만들지 않을게. 믿지? 그만한 일에 수선을 피울 L은 아니었다

 "언제 선배네 가족과 함께 만나면 어떨까?."

좀더 나은 결과를 위해 여자의 신뢰를 얻을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 가족? 아이들?“

  “아니 형제간들 말야. 어른들도...”

  “에이...관둬. 내가 이상한 남자 만날까봐 신경 쓰는 사람들이니 천천히 얘기하도록 하지, ."

  "하긴 그래. 선배, 내 돈이 제대로 들어오게 되면 좀 더 큰집으로 이사하자. 이 집은 어둡고 좁아."

 "집이 좁으면 글을 못 쓰나? 난 아파트에서만 살아서 개인 주택은 춥던데..."

 "그래도 넓은 집에 가보면 생각이 달라질 걸? 요즘엔 시골로 가면 새로 지은 넓은 집들이 많아요. 돌아다니면 좋은 집을 구할 수 있을 거야. 언제 함께 찾아보자고요."

  여자의 집은 글쓰기에는 절대 좋은 공간은 아니었다. 함께 살 일이야 없겠지만 여자는 글을 제대로 쓸 수 있는 곳으로 옮겨갈 필요가 있었다. 함께 섹스를 나눈 사이였고 한때 신세를 진 사람이기 때문에 내가 줄 수 있는 도움이었다. 고양이가 쥐를 생각하는 격이겠지만 무엇이라도 한 가지 정도는 도움이 되고 싶었다. 여자는 내가 말을 하는데도 환영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여자의 눈빛을 보니 생각이 갈등의 교차점에 머물러 있는 것 같았다.

 "선배, 구체적인 얘기는 나중에 하자."

나는 말이 없는 여자를 쳐다보다가 마무리를 지었다. 침묵이 흐르자 여자가 긴 바지로 바꿔 입었다.

 "저녁 먹어야지. 뭐 사다줄까?"

  담배 몇 값을 사다 달라고 하면서 지갑에서 돈을 빼내 주자 여자가 받지 않았다. 한참 후 여자가 들고 온 봉지에는 막걸리가 담겨 있었다. 여자는 막걸리를 식탁에 올려놓은 채 햄과 새우, 김치를 썰더니 볶음밥을 만들었다. 빠른 손놀림이었지만 간이 입에 딱 맞았다.

  “역시 선배는 음식솜씨가 좋아.”

밥을 먹은 그릇에 막걸리를 따르던 여자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여자는 한잔을 홀짝 마시더니 한잔을 더 따랐다.

 “마실래?”

내가 고개를 젓자 여자가 마셨다.

 "문호씨가 만화를 쓴다고 했을 때 시시하다는 생각을 했지. 게다가 피 뽑아서 술 먹고 돈 떨어지면 다시 피를 뽑는다며?"

  피 뽑아 술 먹었다는 말은 내가 번 돈을 함부로 쓰며 살았다는 뜻이었다 반 병쯤 비우자 여자의 말은 막 나갔고 얼굴은 무표정에 가까웠다. 자신의 소설에서처럼 여자의 마음 깊은 곳에는 냉기가 흐르는 모양이었다.

  "시시하다는 생각에 내 만화를 안 읽는구나."

  나는 가까스로 말을 뱉어냈다. 언짢았지만 표정관리를 하느라 뻣뻣해진 얼굴에 가까스로 미소를 담았다. 발리의 L은 내게서 만화 공부를 할 때면 나를 깍듯이 대했고 스승님이라고 높여 부르기도 했다. 물론 L은 애교 차원일 수도 있겠지만 여자에게서 그런 말을 들으니까 심한 거부감이 들었다. 나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

"만화 스토리도 쉽게 쓸 수 있는 건 아니겠지. 미안."

여자가 곧바로 말을 정정했다.

"선배가 옳은 말을 하는 거예요. 이런 상태가 오다보니 만화의 길로 들어선 게 후회막급이네요."

  담배를 물고 라이터를 켜는데 불이 잘 켜지지 않았다. 여자는 내가 던져버린 라이터를 들어 단번에 불을 켰다. 나는 가슴속의 화염까지 끌어 낼 것처럼 연기를 토해냈다. 만화계에서는 유령작가일 수밖에 없었지만 만약 소설을 쓰고 있다면 지금쯤 나는 중견작가로 활동하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었다. 레벨이 맞지 않아 이 여자를 만날 일도 없었을 것이다. 아니 허점이 많은 소설을 투고한 습작생과 심사위원으로나 만났을까?

낡은 가구가 자아내는 음습한 분위기의 거실을 다시금 둘러보았다. 오래 쓴 가구에도 귀신이 붙는다는 말처럼 가구는 거실분위기를 한층 우중충하게 만들고 있었다. 게다가 여자는 그런 분위기를 좋아하는지 아니면 불을 켜는 걸 잊는 건지 늘 어둑어둑한 상태로 앉아 있곤 했다.

"솔직히 저는요. 예쁘고 세련된 여자들을 좋아하는 게 아네요. 선배처럼 열정을 가진 여자가 좋아. 지난번에도 말씀드렸지만 선배가 열 살이 아니라 스무 살이 더 많았더라도 좋아했을 거예요."

  내 곁에 L이 없다 해도 이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내 사전에 연상의 여인이란 있을 수 없었다. 여자에게 있어서 늙음이란 죽음보다 못하다는 속설도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여자로서 생명이 다할 이 여자에게서 무엇을 바랄 수 있을까싶었다. 어쩌면 늙은 여자와 한 공간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내겐 스트레스일 것 같았다. 전처도 나에 비해 일곱 살이나 젊었고, 우유처럼 희고 싱싱한 피부를 지닌 L은 실제 나이보다 더 앳되어 보였다.

  나는 L을 볼 때마다 기이한 인연이라는 생각을 했다. 이상하게도 나는 발리 해변에서 L과 장난을 칠 정도로 금방 친숙해졌다. L이 간혹 아저씨라고 부르다 반말을 하면 가슴이 시릴 정도였다. 나는 약속대로 L을 집으로 데려 갔었다. L은 집에 들어서자마자 내 만화를 뒤적거리더니 낱권 하나를 읽었다.

이 남자 주인공에겐 카리스마가 부족하네. , 제임스 본드를 여자 스파이가 결국 사랑하는 줄 알아요? 외형적으로는 부드러운 이미지의 남자인데 내부적으로는 단단한 몸과 동시에 섹스어필함을 가졌기 때문이지. 섹스를 끝내주게 잘할 것 같은 남자로 보이잖아. 나를 빤히 쳐다보면서 영화를 빗대어 당돌하게 표현하는 L이야말로 섹시어필 그 자체였다. 친구가 화장실에 갔을 때 나는 L의 입술을 훔쳤다. L과의 첫 키스는 아이 적에 혀로 핥던 야생화 꽁지처럼 달콤했다.

 "정말 그럴까? 믿기지 않는데?"

  여자가 튀어나온 앞니를 드러낸 채 고개를 한번 갸웃했다. 이미 키스는 했지만 바라보기에도 거북스런 입이었다. 스무 살이 더 많았더라도 라는 내 표현에 고무되었는지 여자의 볼에 붉은 기가 잠깐 돌다 사라졌다.

 "결코 행복예감은 아닌 것 같아."

  막걸리 한 병이 비워지자 여자가 중얼거렸다.

"선배...잘할게."

"글쎄...후후..."

  여자가 식탁 한쪽에 놓여있던 과일주가 담긴 유리병뚜껑을 돌리면서 자조적으로 웃었다. 바람에 요동치는 나뭇가지처럼 여자의 몸이 심하게 흔들렸다. 침묵이 흐르는 동안 여자는 붉은 빛을 띤 과일주를 줄곧 따라 마셨다.

"빨리 소설 써라. 너는 유능한 소설가가 될 수 있을 거야."

  여자는 머리가 무거운지 고개를 푹 숙이더니 혀 꼬부라진 소리를 냈다. 여자의 정수리는 머리털이 부족해서 여러 갈래로 길이 난 것처럼 보였다. 여자가 술잔을 잡으려다 몇 번이나 헛손질을 했다. 담배에 불을 붙이고서 나는 여자의 행동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알았어요. 선배. 근데 선배는 술을 끊고 나는 담배를 끊어야겠다."

"? 안돼. 나는 술잔 들고 죽을 거야. 다만 우리 아버지처럼 정신병원에서는 죽고 싶지 않아서 하루를 걸러 마시고 있지."

  잔을 마저 비우지도 못하고 여자가 일어섰다. 여자는 유리병 뚜껑도 제대로 닫지 못하고서 휘청휘청 방으로 들어갔다. 여자를 쳐다보던 나는 병뚜껑을 닫았다. 욕실에 들어간 나는 이만 닦고 나와서 침대에 누웠다. 옷을 입은 채 엎어져있던 여자가 코를 골았다.




 

김은숙   2018-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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