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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령작가 (5)


    



                                                                        8

  슈퍼에서 사오는 반찬거리가 한정되어 있어서 며칠간 여자는 고심하는 눈치였다. 나는 돼지고기 알레르기가 있었다. 게다가 어릴 때부터 생선이 밥상에 올라와야 밥 한 그릇을 다 비우곤 했다. 여자는 나와는 반대 식성이었지만 끼니때마다 어류가 한 가지 정도는 식탁에 꼭 올라왔다. 밥을 먹을 때 반찬에 대한 칭찬을 했던 것은 그런 점에 대한 표현이었다.

  여자와 나는 종일 대화에 빠져 있곤 했다. 때로는 오전 10시쯤부터 시작한 대화가 저녁 9시나 되어야 끝이 났다. 그런 날은 침대로 가기 위해 끝을 맺었다고 해야 옳았다. 여자가 술에 몹시 취했던 날만 빼 놓고는 섹스를 했다. 심혈을 기울여야했기 때문에 내겐 스파르타식 섹스라 할 수 있었다. 나는 여자의 절정을 위해 사정시간을 늦추려고 애를 썼다.

여자는 시나브로 타는 숯불 같았다. 천천히 오르고 천천히 식어 내게는 정말 지루한 섹스였다. 내가 오랄 섹스를 시도했지만 L에게서 듣던 그런 괴성은 기대할 수 없었다. 섹스란 가학성이나 변태성을 띠어야 재미있는 것이지만 여자는 지나치리만치 무덤덤했다. 음식을 잘하는 여자가 섹스도 잘한다는 말은 낭설에 불과한 것 같았다. 전날 밤에도 섹스를 지루한 상황으로 몰고 갔던 여자는 눈을 뜨자마자 나를 보고 헤헤거리며 웃었다.

예쁜 여자는 소박을 맞아도 요리를 잘하는 여자는 소박을 맞지 않는다는데...그건 서양 속담에 지나지 않나봐.”

아침부터 무슨 뜬금없는 소리야?”

  혹 섹스와 연관 있는 말인가 해서 나는 되물었다. 여자에게서 의외의 대답이 나왔다.

 “, 버림받았잖아.”

 “버림받았어? 누구에게?”

  “몰라도 돼.”

  여자는 웃기만 했다. 나는 여자를 쳐다보면서 한국 속담을 기억해내고 있었다. 내 생각에는 여우는 데리고 살아도 곰은 데리고 살 수 없다는 게 한국 남자들의 영원한 취향이었다. 여자의 남편도 그랬을 것 같았다. 아마 여자는 앞으로의 삶에서도 남자에 대한 기대를 하지 않아야만 될 거라는 생각이었다.

 “밥해야 하는데 일어나기 싫다야. 딸도 올 거니까 반찬거리도 사와야 하는데...”

 “밥은 반찬 때문에 못하겠고, 슈퍼에 심부름이나 갔다 와야지.”

 “아이구 고맙네요. 아저씨.”

내 팔을 베고서 미적거리던 여자가 일어났다. 나는 여자가 거울 앞에서 머리 만지는 걸 누워 쳐다보다가 다시 눈을 감았다. 섹스는 재미가 없었어도 눈만 감으면 잠에 빠져들곤 했다. 아침이면 머리 속이 너무 개운해서 건망증 환자처럼 잊은 걸 찾아야할 정도였다. 며칠 지나자 여자의 집에 온 이유가 무엇인지 희미해질 때가 있었다.

일주일 이상을 지내다보니 아침에 깨어도 내 집 같았다. 게다가 서로 비슷한 점이 너무 많았다. 털털한 면도 그렇고 한없이 얘기하려는 욕심도 그랬다. 얘기를 하다 눈으로 천장을 더듬는 것까지 여자와 나는 흡사했다.

  여자의 딸아이가 온다하니 그만 일어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딸과 신뢰를 쌓으면 더 좋은 결과물이 얻어질 수도 있을 거란 생각이었다. 나는 슈퍼에 가기 위해 티셔츠 위에 조끼를 걸쳤다.

  딸아이가 도착했다고 터미널에서 전화를 하더니 10여분 후쯤 현관문을 밀고 들어 왔다. 현관 쪽에 그늘을 드리울 정도로 덩치가 큰 아이였다. 쳐다보는 내게 시선을 주지도 않고 고개만 꾸벅했다. 이미 내 얘기를 했는지 여자와 딸은 별 대화가 없었다.

  “엄마.”

  여자의 딸은 내가 여자와 침대에 누워 얘기하는 동안 문을 두들기며 불렀다. 염탐하려는 것 같진 않았지만 빠끔히 열린 문으로 눈빛이 밀려들어오는 것 같았다. 그 아이는 짙은 눈썹에다 눈빛까지 유난히 강렬해서 일본인처럼 부담스러운 얼굴이었다.

  “?”

  “밥 좀 줘.”

  “얘는... 차려 먹잖고...”

  여자는 딸아이를 귀찮아하는 거 같았다.

  “내가 차려줄까?”

  “아냐, 냅둬.”

  여자는 몸을 일으키더니 바람소리를 내면서 나갔다. 열린 문틈으로 둘 사이의 대화를 얼핏 들으니 딸이 토라져 있는 것 같았다. 여자를 닮아 딸도 팔등신과는 거리가 멀었다. 가장 낙제점을 받을만한 몸의 부위는 남자처럼 벌어진 어깨였다. 허리에서 엉덩이 쪽으로는 어느 정도 균형이 잡혀 있었지만 배에 지방질이 끼어있는지 의자에 앉으니까 겹쳐진 살이 옷 위로 드러났다. 여자가 처녀였을 때의 몸매가 상상되었다.

  “선주야. 회사 생활 고달프지 않아?”

  식탁 앞에 마주앉은 나는 그렇게 물었다.

힘든 줄은 모르겠지만 지루하긴 해요. 12시간씩 일해야 하니까요. 중간에 쉬는 시간이 끼어있긴 하지만 시간이 참 안가거든요.”

야! 그게 뭐가 힘들어. 내 나이가 되어봐라. 식당의 설거지도 그렇고 네 다섯 시간 청소를 하다보면 걸레질에 따라 왜 사냐는 소리가 가락처럼 흘러나올 정도야.”

  딸이 눈을 모로 뜨면서 입술까지 돌아가는 표정을 지었다.

엄마는 어쩌다 하는 일이잖아.”

이런. 엄마가 이십 년 가까이 맞벌이를 했다는 거 잊어버린 모양이네. 소설도 소설이지만 이젠 일하기도 벅찬 나이야. 낼 모레이면 오십이잖니. 난 쉬면서 소설만 쓰고 싶어.”

나는 누구의 편도 들 수가 없어 커피만 홀짝거렸다. 여자가 식은 커피를 단번에 마셨다.

어이구 커피에서 담배 맛이 나네. 잘못 탔나봐.”

여자가 얼굴을 찡그리며 말을 했다.

냉동 건조 커피는 원두커피와 달리 씁쓰레한 맛이 나.”

나는 여자와 딸아이를 번갈아 쳐다보면서 말을 했다. 딸아이는 커피 잔을 아예 들지도 않았다. 딸아이의 볼 아래쪽 근육이 딱딱해 보였다.

다른 애들은 부모들이 등록금 다 해줘. 나나 공장 다니지.”

엄마가 이혼하면서 그런 말했잖아. 대학 등록금은 네가 벌어 다니라고..”

엄마가 돈도 안 되는 소설에 매달리니까 나까지 구질구질해지는 거지.”

말을 하면서 딸아이는 벌떡 일어났다.

? , 앉아봐.”

엄마 맘대로 살잖아.”

...”

목청을 높이던 여자가 팔을 뻗었지만 허공만 내젓다 말았다. 딸은 붉어진 얼굴로 눈을 흘기더니 성큼성큼 방으로 가버렸다. 여자가 금방 고개를 떨어뜨렸다. 식탁 유리에 후드득 눈물이 떨어졌다.

철없는 애 말이니 신경 쓰지 마.”

  나는 휴지로 유리를 문지르면서 한쪽 손으로 여자의 어깨를 두들겼다. 여자의 눈물이 멎은 것을 보고 나는 방으로 들어갔다.

엄마가 고생을 많이 하셨던 것 같은데...”

됐어요. 아저씨는 상관 마세요.”

에이...그럼 안 되지.”

  외면하던 딸아이는 얼굴을 돌려 똑바로 쳐다봤다.

아저씨가 도와주실 건가요? 손해나 끼치지 않으면 다행이죠.”

  아이는 차갑게 말을 뱉었다. 나는 딸아이의 얼굴을 쳐다보다 시선을 피했다. 맞부딪는 건 되도록 피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나를 어떻게 생각하든 관계없어. 하지만 엄마에게 사과는 드려야지.”

나를 쏘아보던 눈빛의 강도가 약해지면서 아이가 시선을 거두었다. 아이는 곧장 거실로 갔다.

엄마. 내가 힘들어서 그냥 해본 소리야. 난 소설 쓰는 엄마가 자랑스러워. 친구들이 나보고 부럽다고 하는 걸.”

여자가 고개를 들고 딸을 쳐다보았다. 여자는 붉혀진 눈시울을 어쩌지 못하고 웃음을 지어 보였다.

힘들어도 체험을 위해 일한다는 생각을 해라. 너도 글을 쓰려면 고생을 고생이라고만 생각해서는 안 되는 거야.”

성대가 비좁아진 것처럼 여자는 가까스로 말을 토해냈다. 딸아이는 더듬거리는 여자를 쳐다보다가 눈을 내리깔았다.

"엄마, 난 사람이 많은데서 일하기가 싫어. 때로는 내 몸의 일부가 기계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딸아이의 목소리는 차분히 가라앉아 있었다.

"선주야. 걱정하지 마. , 타자 잘한다며? 아저씨가 무협을 계약하게 되면 계속 아르바이트생이 필요한데 네가 하면 되겠다."

  고심하고 있던 차에 머리를 스치는 생각이었다. 물론 아르바이트생이 필요할 리가 없었다. 지금 가지고 있는 원고는 여자에게 맡겨도 될 분량이었다. 계약 후의 타자는 발리의 L 몫이었다.

  "그래요?"

  "그럼."

  딸아이가 눈빛을 누그러뜨리긴 했지만 여전히 의아해하는 눈초리였다. 여자보다 훨씬 다루기 힘들어 보이는 복잡한 표정을 가진 아이였다. 나는 딸이 자칫 일을 망칠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 한층 목소리를 부드럽게 냈다.

"선배도 걱정하지 마. 글만 제대로 쓰게 되면 고생 안 시킬 거야. 한 달에 이백 만원은 가져다줄게."

"에이...믿지도 않는다."

  여자가 오리 주둥이처럼 입술을 내밀더니 눈을 흘겼다.

 "정말이야. 옛날에는 오백 만 원씩 벌었어. 못 믿겠으면 통장 복사해서 보여줄게. 요즘 출판사 사정이 좋지 않아 못 받은 돈도 있고 상황이 좋지 않으니까 글이 좀 안 써져서 그렇지. 무협도 조금 더 쓰면 계약할 거예요. 글이 안 되면 절에 가서라도 써야지. 한 달 후쯤엔 몫 돈이 들어 올 것 같아."

  여자의 표정은 밝아졌고 딸아이도 얼굴에 미소가 올랐다. 오후에는 여자의 딸에게 오래 전에 시작해 놓았던 무협의 일부를 타자해 달라고 했다. 만화 콘티 작업이야 손으로 했기 때문에 나는 컴퓨터 자판을 익힐 필요까지는 없었다. 이십대 때 잠시 썼던 소설 습작도 나는 원고지에 직접 했다. 무협 원고는 에이 포 용지에 깨알처럼 쓴 것인데 흘림체라서 나 이외에는 알아보기 힘들었다.

딸아이는 글쓰기 지도를 받았는지 내가 불러 주는 걸 정확히 타자했으며 비문도 가려낼 줄 알았다. 무협은 독자들의 흥미만을 위한 글이다 보니 내게 있어서는 치부나 마찬가지였다. 딸아이의 옆얼굴을 잠깐씩 쳐다보곤 했는데 아이는 무심한 표정으로 타자에만 열중하고 있었다. 생각할 여유를 주지 않기 위해 나는 아이의 타자 속도에 거의 맞춰서 원고를 읽었다.

  딸아이가 여자에게 첫 독자라면 내겐 L이 첫 독자였다. L의 만화 스토리 공부는 빠르게 진전이 되고 있었다. L이 만화에 대한 감성이 그런대로 발달되어 있어 시작한 일이었다. 앞으로 L이 만화 스토리를 쓰게 된다면 나는 소설만을 쓸 계획이었다. 물론 그때 L은 만화 스토리를 만들면서 내 소설의 타자까지 겸할 예정이었다. 여자의 딸아이를 L과 비교하다 보니 묘한 느낌이 들었다.

  귀 앞으로 삐져나온 머리칼을 당기는 버릇이 있는 딸아이를 쳐다보면서 마지막 원고를 읽었다. 아이는 타자가 끝나자 컴퓨터 앞의 회전의자를 뒤로 밀면서 일어났다. 나는 인쇄물을 챙기고는 고개를 까딱하는 딸아이를 쳐다보면서 웃어 보였다. 아이가 나를 흘끔 쳐다보았는데, 무심한 건지 아니면 냉소가 어린 건지 분간 못할 정도의 미묘한 표정이었다.

  “선주야 잠깐만...”

내게 등을 보이고 섰던 아이가 고개만 돌렸다.

  “수고를 했는데 수고비를 빼 먹으면 되겠니?”

  그 말을 하자 아이가 돌아섰다. 나는 도서 상품권을 꺼내기 위해 지갑을 펼쳐 들었다. 갑자기 L이 활짝 웃으며 나를 쳐다보았다. 사진 속의 L은 친구의 어깨에 깍지 낀 손을 얹고 있었다. 둘은 대학에서 미모로 라이벌이었다. 노트처럼 얇은 L의 앨범에 있던 이미지 사진 중 하나를 골라 내 지갑에 넣어 두었는데 그 사실을 깜빡하고 있었던 것이다. 오래되어 모서리가 닳은 도서 상품권을 꺼내는 데 손이 떨려 꽉 쥐었다. 그때 마침 소파 앞쪽에 앉아있던 있던 개가 갑자기 일어섰다. 내 손에 쥐어진 것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었던 것 같았다. 내 지갑 쪽으로 다가왔던 아이의 시선이 개에게로 옮겨갔다.

  “, 줄 것이 아냐.”

  손가락으로 개의 머리를 톡톡 치면서 아이가 말했다. 아이의 표정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어 보였다. 나는 웃으면서 다섯 장의 상품권을 아이에게 내밀었다

  “상품권으로 책 사 보거라.”

  아이는 두 손으로 상품권을 받았다. 아이가 방으로 들어가자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여자의 딸아이는 일박이일 동안 집에 있다가 갔다. 술래잡기를 하는 것처럼 내가 없는 공간만 찾아다니는 걸로 봐서 마주치기 싫어하는 것 같았다. 하긴 내 수첩에서 L의 사진을 봤다면 기분이 좋을 리는 없었다. 게다가 여자가 나와 함께 있기 때문에 아이가 겉돌 수도 있었다.

  아이가 비디오테이프를 자주 빌려 오는 걸 보면서 언제 영화나 함께 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이를 개인적으로 만나겠다는 건 여자가 나를 신뢰해야했기 때문이었다. 형식으로 따지자면 나는 아이의 아버지가 될 수도 있는 사람이었다

  영화를 보겠다는 약속을 받아낸 건 택시를 타기 위해 연립 앞길에 아이와 함께 서 있을 때였다. 일부러 나는 배웅을 나왔었다. 아이는 미적거리다가 전화번호를 내 수첩에 적었다. 나는 아이에게 차비를 쥐어주고 손가락으로 V자를 그려 보였다.          

 

                                                                          9

  딸아이의 태도로 봐서 남자가 들락거렸을 것 같기도 했다. 여자의 입에서 수첩의 사진에 관한 얘기가 나오지 않는 게 이상했다. 문득 애인이 있는 여자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가 가자 나는 여자의 사생활이 궁금해서 흔적을 살폈다.

  집에는 남자에게 필수품인 면도날은 있었지만 그 외 남자가 사용할만한 물건들은 눈에 띄지 않았다. 화장품이 대부분 값싼 제품이었고, 여자의 팬티가 거의 무색 계통인 것으로 보아 남자에게 별 관심이 없어 보이기도 했다. 하긴 남자가 좋아할 만한 매력이 없는 스타일이니 당연하리라 여겨졌다. 그렇다고 해도 내 생각이 전적으로 맞을 리도 없었다.

"선배, 나랑 함께 산다 해도 연애는 맘대로 하세요."

소파에서 개를 안고 있다 생각 끝에 뱉어낸 말이었다. 여자는 치자색 플라스틱 수저를 빨다가 내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나는 결혼 후 외도를 해 본적이 없는 사람이야. 물론 혼자 지낼 때는 남자와 연애는 했지만 양다리를 걸친 적은 없어."

여자가 잘라 말하고는 아이스크림을 수저로 떠서 내게 내밀었다. 아이스크림 덩어리가 몇 숟가락 분량은 되어 보였다. 나는 목구멍에 걸릴 것 같아 힘을 주어 삼켰다. 녹지 않은 아이스크림이 식도에서 멈칫멈칫하다 겨우 내려갔다.

"...그런 이야기가 아니고... 자유로워야 좋은 글을 쓸 수 있으니까요."

"글쎄... 그럴까?"

  마뜩찮은 표정이었지만 여자는 반박하려들지는 않았다.

"선배를 얼마 겪진 않았지만 엄청 보수적이라는 생각이 들어. 선배의 소설에서는 성적인 억압이 느껴진단 말예요. 여주인공들이 대부분 그렇거든요. 다만 섹스 장면은 잘 다루더라. 경험이 많은가?"

나는 실실 웃으며 말했다.

"참내, 맘대로 생각해라."

실은 섹스에 대해 가르친다 해도 진도가 나가기 어려울 것 같은 여자여서 나는 껄껄 웃었다. 내 생각을 알리 없는 여자도 따라 웃었다. 갑자기 내 휴대폰이 부르르 떨었다. 나는 소파에서 일어나 휴대폰을 열었다. 콘티 작업 보조자인 후배였다.

내 수입의 30% 정도는 후배에게 돌아가야 했지만 몇 달째 계산을 못해주고 있었다. 요즘에는 원고료가 얼마 되지 않아 그 후배에게 갈 돈은 거의 없었다. 나는 후배의 말을 건성으로 들으며 베란다 창을 통해 멀리 바라보고 있었다. 눈높이의 산 밑 철로에 기차가 지나는 게 보였다. 절름발이가 다리를 끄는 것처럼 기차의 바퀴에서 절거덕거리는 소리가 났다.

"선배, 여윳돈 있어요?"

  휴대폰을 닫은 후 한숨을 쉬며 내가 말했다. 여자도 대충 짐작은 할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여자가 씻은 아이스크림 통을 들고 내 앞으로 왔다. 내가 비켜나자 여자는 통을 베란다의 바구니에 던져 넣었다.

"아니..., 근근이 살잖아. 나도 이젠 대출 받아 살아야해."

  의외로 냉정한 말투였다. 하지만 여자처럼 단순하면서 솔직한 사람은 거의 마음이 약한 편이었다. 설득만 잘하면 어려울 게 없을 거라는 생각이었다.

  만화 스토리 작가 16년 동안 많은 내 손을 거쳐 간 무수한 양의 돈을 떠올렸다. 가장 씁쓸했던 일은 이혼 후 간혹 다니던 사창가에서였다. 나는 한 창녀의 고객이 되었고 얼마 후 그 창녀의 빚을 청산해 주었다. 그 여자에게 자유를 주고 싶어서였다. 그녀는 도움을 입었다고 생각했는지 내 집에 들어와 6개월 정도 살았다. 담배야 맞담배를 피우면 그만이었지만 그녀는 무슨 일에든 절제라는 걸 몰랐다. 내가 냉정하게 대하자 집을 슬그머니 나가더니 그 여자는 다시 창녀생활로 돌아갔다.

  그 당시 내 주변을 맴돌던 사람들도 많았다. 나는 기분이 내킬 때면 주변 사람에게 돈을 찔러 주기도 했다. 그들은 막상 내가 필요해서 연락을 하니 대부분 떨떠름해 했다. 뭉텅이로 돈이 들어오기도 했고 마음대로 가불해 쓸 수도 있었던 그 시절에 나는 저축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해 본적이 없었다. 넉넉하게 살던 사람이 쪼들리는 생활을 하는 게 쉬운 일은 결코 아니었다. 지금은 출판사가 사경을 헤매니 나 또한 그 처지였다.

 "출판사에 이천만원이나 묶여 있어. 사장은 어디로 숨었는지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여자가 의자를 돌려 나와 무릎을 맞대고 앉았다. 나는 쓰다듬던 개를 내려놓았다.

 "그럼 생활은 어떻게 하는데?"

 "남의 돈으로 살고 있지. , 빚쟁이야. 그래도 선배 집에 온다면 받아 줄래?" 

 "밥이야 해 줄 수는 있겠지."

여자가 내 발을 끌어당겨 무릎 위에 올리고 발가락을 하나하나 만지작거렸다.

 "고마워..."

  내 엄지손가락을 여자의 입술에 대자 입을 조금 벌렸다. 여자가 혀끝으로 내 손가락 끝을 간질거렸다.

 "천만 원 정도만 있으면 모든 일이 풀릴 것 같아. 공과금이 가장 큰 문제고 카드 대금도 그렇긴 하지. 까짓 거 빌린 돈이야 좀 미루면 되지만... 출판사 개자식들!"

 "한 오 백은 어떻게 해 볼 수도 있겠지만. 천만 원을 만들려면 융자 받아야할 거야. 내 사는 꼬라지도 이렇고 해서 담보융자 같은 건 받고 싶잖아."

 "물론 담보 융자는 나도 싫으네. 선배...고마워. 내가 무슨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고..."

 "그럼 오 백 만 어떻게 해볼까?"

  여자는 바깥쪽으로 시선을 돌리면서 중얼거렸다. 나는 여자의 무릎에서 발을 내리고 여자의 입술에 내 입술을 갔다댔다. 밖은 아직 밝은 기운이 남아 있었지만 거실은 어느 정도 어두운 상태였다. 그 동안 얘기를 하느라 불도 켜지 않고 있었다. 일어나서 소파에 여자를 앉히고 식탁 의자에 있던 방석 두개를 가져다 거실에 깔았다. 나는 방석에 무릎에 꿇고서 여자의 옷을 하나씩 벗겼다.

  반응이 없을 것 같던 여자의 몸에 내 입술이 닿자 조금씩 꿈틀거렸다. 여자의 몸이 빨리 젖지 않아 발기되었던 성기가 맥없이 주저앉았다. 나는 일부러 L과의 섹스를 떠올렸다.

  한 아름이나 되는 태양이 바다 끝에 앉으면 하늘에서 바다로 붉은 물이 번졌다. 지는 해를 바라보며 모래사장에 누워있는 L의 몸은 금빛을 띠어 마치 인어 같았다. 기온이 약간 떨어지면서 L의 몸에 모래알 같은 소름이 좍 퍼졌다. 탱탱해진 L의 젖가슴에 방울토마토 같은 유두가 살짝 얹혀있는 듯이 보였다. L의 젖은 머리칼에서 비릿한 바다 내음이 느껴졌다. 혀끝에 닿는 L의 몸 구석구석마다 짭짤한 소금간이 배어있었다. 자맥질을 하듯 바다로 뛰어드는 해를 보면서 L의 몸속을 파고든 내 몸은 절정을 향해 줄달음쳤다.

  차츰 흥분이 되는 것 같아 여자의 가슴을 더듬으면서 눈을 떴다. 나이든 흑인여자처럼 시들시들한 수세미 모양의 젖가슴에 내 시선이 꽂혔다. 여자의 젖가슴은 정면을 향해있지 않아서 마치 유두가 삐뚤게 붙어있는 것 같았다. 힘차게 일어섰던 내 성기가 갑자기 물에 젖은 솜뭉치처럼 되어버렸다.

  나는 계속 흐느적거리는 물건과 씨름을 하다 마스터베이션을 시작했다. 천천히 피가 몰려들기 시작했다. 성기는 바람을 주입하는 길거리의 광고용 애드벌룬처럼 일어날 듯 일어날 듯하다 겨우 일어섰다. 반쯤 누운 자세의 여자가 두 팔로 내 머리를 끌어안았다.

 

                                                          10

   “문호씨는 토끼이고 내가 거북이라는 것 알고 있어?"

  은행에 가기 위해 옷을 입던 여자가 거울 앞에서 하는 소리였다. 다소 엉뚱한 말이라 수건으로 얼굴을 닦던 나는 여자에게 다가갔다. 여자의 손에는 살이 굵은 빗이 들려있었다. 나는 거울 속의 여자를 쳐다보았다.

 "그게 무슨 말? 선배가 나보다는 더 토끼에 가까운 얼굴인데..."

 "내가 토끼같이 생겼나? 하는 짓은 미련한 거북이인데... 거북이는 토끼와의 경주에서 뻔히 질 줄 알면서 토끼의 제안을 받아들이잖아."

여자는 말을 하면서 머리를 빗던 빗을 놓았다.

"결국 경주에는 거북이가 이기잖아."

나는 눈을 빠르게 깜박이면서 말했다.

 "그렇긴 하지."

여자가 덤덤하게 대답을 했다. 나는 여자가 말하는 의도가 궁금했다.

 "그런데 하필 나는 토끼일까?"

 "토끼는 영리하잖아."

여자가 정색을 하고 말을 했지만 내가 듣기에는 아이큐가 좋다는 걸 빗대어서 하는 말 같진 않았다.

 "토끼는 낮잠 때문에 경주를 망치잖아."

  나는 말을 하면서 여자의 표정을 살폈다. 여자는 로션을 바르더니 한참동안 뚜껑을 닫았다.

 "그 결론은 머리 좋은 토끼가 제 꾀에 넘어간다는 작가의 의도 때문이지. 토끼는 토끼끼리 경주를 해야 하고 거북이는 거북이끼리 해야지 공평 한 거야."

 "에이 선배도...그럼 우화라고 볼 수 없잖아."

 "그건 그래."

  여자는 애매하게 말을 시작해서 애매하게 끝내고 있었다. 대출을 받지 못하면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가기 때문에 나는 더 이상 질문을 할 수도 없었다. 나는 여자가 썼던 날이 듬성듬성한 빗으로 머리를 빗었다. 제대로 빗어지지 않았지만 입에 물고 있던 줄로 그냥 묶었다.

 "정말 미안해."

도장과 주민등록증을 챙기는 여자를 보면서 내가 말했다.

 "약속이나 잘 지켜."

여자가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다.

 "걱정 마. 아마 한두 달 새에 다 갚을 거야."

물론 떼어먹을 생각은 없었다. 잠시 빌리는 것일 뿐이었다. 오늘 손에 쥐어질 돈으로는 우선 카드 빚과 공과금을 어느 정도 청산하고 발리행 비행기 삯과 한두 달 정도의 생활비만 마련되면 손을 더 벌릴 필요도 없었다. 몇 번 더 거짓말을 하면 발리행 비행기를 무난히 탈 수 있을 것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나는 약속을 꼭 지키는 놈이야."

신발을 신느라 펑퍼짐한 엉덩이를 쳐들고 있던 여자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어차피 나도 소설로 문단에 얼굴을 들이밀려면 오점을 남기지 않는 게 좋았다. 여자와 다시 얼굴을 맞대는 시간이 오겠지만 그 문제는 어떤 식으로든 그때 해결되리라는 생각이었다.

  “어제 내가 무협 원고 독촉전화 받았잖아. 계약을 서둘러야 할 것 같아. 계약금으로 삼 백 정도는 받을 수 있을 거야.”

  여자에게 돈을 지금 더 받아내는 게 중요할 것 같았다. 물론 무협계약을 하루 이틀에 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고 계약금을 원하는 대로 받는다는 것도 미지수였다. 여자가 책을 낸 적이 없어 내 말을 믿을 수밖에 없을 거라는 생각이었다.

  나는 여자와 나란히 걸으면서 내 무협소설에 대한 얘기를 시작했다. 여자는 고개를 숙이고서 진지하게 듣고 있었다. 여자가 700만원을 대출하겠다는 대답을 한 건 은행 앞에 도착했을 때였다. 시계를 보니 은행과의 거리가 걸어서 딱 15분이었다. 더도 덜도 말고 15분이라는 게 내겐 너무 고마운 시간이었다.

    



 

김은숙   2018-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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