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검색
회원가입   아이디/비밀번호찾기  
아이디    비밀번호
   자동로그인     
장편소설
유령작가 (8)
유령작가 (7)
유령작가 (6)
유령작가 (5)
유령작가 (4)
유령작가 (3)
유령작가 (2)
유령작가 (1)
별을 품은 여자 <4>
별을 품은 여자 <3>
별을 품은 여자 <2>
별을 품은 여자 <1>







 :: 별을 품은 여자 <2>


 

 

5. 어머니의 남자 그리고 첫사랑

 

양희는 몇 년 늦게라도 정수를 중학교에 진학시키고 싶었지만 정수가 고집을 피우는 바람에 포기했다. 정수 말처럼 단칸방에서 계속 살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자신은 손톱 밑에 기름때가 끼어도 동생들이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게 정수의 생각이었다. 남수는 상고에 진학을 시키고 막내 인수는 대학에 보내겠다는 취지는 양희와 일치했다. 인수는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 전교에서 톱이었다. 중학 입학 때 인수는 장학생이 되었고 양희와 정수의 가슴을 뿌듯하게 했다. 단칸방에서 두 칸짜리 방으로 옮기게 되어서 옷 갈아입을 때의 불편함도 해소되었다. 방은 좀 컸지만 상하 방 형식인데다 부엌으로 들어가야 하는 결점이 있었다. 대신 부엌이 넓었다.

가장 큰 문제는 어머니였다. 몇 년 전부터 남자가 있었지만 최근 들어서는 일주일에 한 두 번씩 외박을 했다. 정수와 의논할만한 일이 아니라서 그냥 두고 보는 수밖에 없었지만 양희는 늘 신경이 곤두 서 있었다. 요즘 들어서는 간혹 집에서도 화투를 치는지 때론 담배연기가 자욱했고 담요가 방에 깔려 있기도 했다.

집안이 그런 것들로 엉망인 게 아닐까 생각하며 들어오던 길이었다. 부엌문이 한 뼘 정도 열려있어 밀었다.

“일찍 오네? 야근 한다고 하지 않았냐?”

문턱에 엉덩이를 걸치고 신발을 신으려던 어머니가 양희를 보자 말을 던졌다.

“오늘은 취소되었어요.”

“그래? 나 요 아래 시장에 갔다 올란다. 잠깐 집에 있어라.”

신발도 제대로 신지 않고 문턱에서 일어나던 어머니는 얼굴의 방향을 방 쪽으로 틀었다.

“잠깐 양희랑 있어.”

사근사근해지는 어머니 말투와 담배연기가 흘러나오는 것으로 보아 남자가 있는 것 같았다.

“누구에요?”

“누구긴 누구야. 김씨지.”

어머니는 약간 퉁명스럽게 내뱉고는 종종 걸음을 쳤다. 양희는 아이들이 있나 두리번거렸다. 다행히 보이지 않았다. 사월이라 해가 길어져 아이들 걱정은 되지 않았지만 괜찮던 기분이 싹 가라앉아 버렸다. 항상 야근이 지겨웠지만 오늘은 일찍 왔다는 게 오히려 부담이었다.

“양희 아가씨. 들어 와 봐요.”

차분한 목소리였다. 이름을 어떻게 알까 싶었다. 양희는 김씨에 대해 단 한 번도 어머니에게 물어 본 적이 없었다. 외박을 하게 되면 어머니는 아침밥을 지을 무렵 들어왔다. 부엌에서 쌀을 씻는 양희와 눈을 마주치려하지 않고 늘 둘러댔기 때문에 남자라는 짐작을 하고 있었다. 어떤 날은 그보다 일찍 들어와서 부엌에서 아침을 준비했기 때문에 다른 애들은 잘 알지 못했다. 양희가 열린 문으로 몸을 반쯤 밀어 넣고 김씨를 쳐다보는데 의외로 용모가 괜찮았다. 하긴 어머니야말로 누구에게나 예쁘다는 얘길 듣는 편이었다. 양희는 방에 들어가지 않고 문턱 앞에 서 있었다.

김씨의 손톱 끝에 기름때가 끼어 있었지만 옷차림도 깔끔했다. 어머니가 옷차림에 집착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어머니 보다 두세 살쯤 젊어보였다. 턱 끄트머리에 찍힌 자국처럼 흉터가 있어 눈에 거슬렀다.

“엄마가 양희 칭찬 많이 하던데 역시...”

부드럽게 말하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김씨의 눈길이 양희의 얼굴을 서너 번 정도 오르내리더니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담배를 꺼냈다. 먼저 피우던 담배는 재떨이에 구겨져 있었지만 방안에는 아직 연기가 자욱했다. 라이터를 켜는 소리가 열쇠를 돌리는 것처럼 찰칵 소리를 냈다.

“문 활짝 열어 놓고 들어 와 봐요.”

한 모금을 빤 후 연기를 뿜어내면서 김씨가 말했다. 양희는 가방을 밀면서 무릎걸음으로 방으로 들어갔다. 치마를 입었기 때문에 조심스러웠다.

“잠시만요.”

치마가 짧지 않았지만 가방을 뒤쪽으로 돌려 치마를 누르면서 건넌방으로 들어갔다. 양희는 벽에 몸을 기대고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 미닫이 고리를 걸고서 치마를 추리닝바지로 갈아입었다. 윗도리를 벗지 않고 그 위에 추리닝을 걸쳤다.

“이쪽으로 와 봐요. 줄게 있는데...”

잠시 앉아서 숨을 고르는데 김씨가 미닫이를 두들겼다. 미닫이가 넘어질 것처럼 덜커덩거렸다. 양희는 치마를 못에 걸고 문고리를 잡아 뺐다.

“아...왼손이 그렇구나.”

김씨가 양희를 쳐다보면서 손을 내밀었다. 양희는 김씨의 입술에 물려 있는 담배를 쳐다보면서 왼손을 등 뒤로 돌렸다. 김씨가 양희에게서 시선을 떼면서 양쪽 코로 연기를 내뿜었다. 담배를 끄고 난 다음 양희를 다시 쳐다보는데 시선이 집요하게 느껴졌다.

“일은 고되지 않니?.”

“아니요.”

양희는 무릎을 꿇고 앉으면서 낮은 소리로 대답했다.

“우리 사이좋게 지내자.”

반말이 친근하게 느껴질 수도 있었겠지만 오히려 불편했다. 지나치게 다정한 어투가 귀에 거슬렸다. 김씨가 양희의 왼쪽 어깨를 가볍게 잡았다. 양희가 약간 밀어내는 포즈를 취하자 김씨의 손이 내려오면서 왼손을 잡았다. 손아귀에 잡혔기 때문에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속살이라서 아주 부드럽구나. 안쓰럽네.”

김씨가 손가락으로 손등과 손바닥을 문질렀다. 잡아 빼자 슬그머니 손을 놓으면서 옆에 놓은 종이 백을 밀었다. 김씨가 시선을 떼지 않고 있어서 등과 목 언저리에 진땀이 났다.

“옷을 사왔는데 잘 어울릴라나 모르겠다. 네 엄마가 치수를 얘기했으니 맞긴 할 거야.”

쇼핑백에는 극장 간판에 얼굴을 자주 들이미는 여배우 사진이 박혀 있었다. 양희는 쇼핑백 안쪽으로 시선을 떨어뜨렸다가 얼른 거둬들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김씨에게 선물을 받아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이거 안 받겠어요.”

양희는 김씨의 시선을 외면하면서 쇼핑백을 밀었다.

“나는 네 아버지나 마찬가지야. 너희들을 보는 순간부터 죽 그런 생각을 해왔어. 동생들 것도 막내 것도 들어 있다. 난 네가 동생들을 아끼는 마음을 잘 알고 있어.”

김씨는 말을 하면서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쇼핑백에 얹힌 기름때 묻은 손이 눈에 들어오자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고맙습니다.”

양희는 인사를 한 뒤 두 손을 무릎에 얹고 잠자코 있었다. 김씨의 투박한 손이 머리 이마 위로 올라오더니 흘러내린 앞 머리칼 몇 올을 잡아 귀 뒤로 꽂았다. 김씨의 몸에서 기름 냄새가 풍겼다. 양희는 무릎걸음으로 뒤로 약간 물러났다.

“몸이 얄상해서 옷이 잘 어울리겠다.”

김씨가 쇼핑백에 손을 집어넣더니 옷을 꺼내 들었다. 파스텔조의 물빛 원피스였다.

“이건 피부가 검은 사람이 입으면 촌스럽거든.”

김씨는 원피스의 어깨선을 잡고서 양희의 양쪽 어깨에 가져다 댔다. 더 이상 뒤로 물러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양희는 장롱에 몸을 바짝 붙였다.

“엄마 오면 입어봐라.”

웃는 표정으로 양희를 바라보던 김씨가 옷을 접어 봉투에 다시 넣었다. 그 틈에 양희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엌을 지나 밖으로 나오니까 숨이 트이는 것 같았다. 부엌문을 닫고 숨을 크게 내쉬었다.

양희는 집이 보이지 않는 위치에 서서 아래쪽을 내려다보았다. 도로 위에서 장난감 차가 달리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도 처음 이사 왔을 때보다는 아래쪽으로 약간 내려온 셈이었다. 버스 정류장까지는 어른 걸음으로도 15분 이상 걸렸다.

양희가 서 있는 곳은 자투리땅처럼 제법 넓었고 느티나무가 서 있었다. 연두빛 잎이 잔가지에 콕콕 찍은 붓 자국처럼 매달려 있었다. 아직은 잎이 잘아 오히려 가지가 더 무성해 보였다. 둥치의 껍질이 피부병을 앓는 것처럼 군데군데 떨어져 나가 얼룩덜룩한 느낌이었다. 양희는 나무의 가지 사이사이를 훑어보았다. 여름이면 매미소리가 자지러지는 곳이었다. 매미를 떠올리자 고향이 생각났고 고무신을 때우던 시절이 아득하게 느껴졌다. 그 근처에서 사람들이 쓰레기를 태우곤 했는데 뽀글뽀글 소리를 내며 끓던 고무죽 냄새와 비슷해서 눈시울이 젖어들곤 했다.

아래쪽에서 올라오는 어머니가 보였다. 길이 가팔랐다가 리을자로 구부러졌다 하는 바람에 보였다가 사라지곤 했다. 어머니는 세련된 모습이었다. 어머니의 원대로 피부도 하얘지고 손도 고와졌다. 어머니의 나이는 서른아홉이었지만 긴 머리 파마에다 항상 화장을 하기 때문에 또래보다 젊어 보였다. 어머니는 자신만을 사랑하면서도 자식들 때문에 재가를 못하고 있다는 불평을 늘어놓곤 했다. 자식의 관점에서 보자면 어머니는 모순덩어리였다.

“왜 나와 있어?”

“바람 좀 쐬려구요. 밖이 시원하네요.”

“김씨랑 얘기 좀 하지. 니네들이 가까워지려고 해야 나도 편하지. 김씨가 오늘 봉급 탔단다. 니 옷은 마크가 붙은 걸로 샀다드라.”

어머니는 이제 사투리를 거의 쓰지 않았지만 외래어는 제대로 알지 못해서 엉뚱하게 발음을 하곤 했다. 어머니는 고등학교 중퇴인 김씨에게 수준을 맞추려고 애를 쓰는 듯했다. 초등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했으니 열등감을 가질만했지만 외래어를 섞어 쓴다고 나아 보이는 건 아니었다. 물론 양희도 그 부분에서는 예외일 수가 없어 되도록 외래어를 쓰는 걸 피했다. 어머니는 김씨와 사귄지 이년쯤 되자 남 같지 않다는 말을 했다. 그러는 어머니에게 쳐다보는 김씨의 눈초리가 이상하다고 얘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어? 모녀가 같이 오네.”

김씨에게서 스킨 냄새가 났다. 양희가 나가있는 동안 세수를 한 것 같았다. 티셔츠의 칼라의 앞부분이 조금 젖어 있었다. 어머니는 방안에서 들이 밀었던 머리를 빼더니 부엌에 쭈그려 앉았다. 양희는 건넌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장롱을 열어 놓은 채 그 앞에 바투 서서 윗옷을 갈아입었다.

“왜 나오냐? 김씨 아저씨랑 얘기 좀 하지. 오늘은 너하고 꼭 인사를 하겠다고 했단다.”

봉지에서 깻잎과 상추가 나왔다. 묵직한 봉투에는 삼겹살이 들어 있었다. 물컹한 봉지가 만져지자 궁금해서 양희는 얼굴을 바싹대고 들여다보았다. 비릿한 냄새가 확 풍겼다.

“김씨 고향이 대천이잖냐. .잘 먹자고 사는 건데 뭐. 니네들도 오늘 맛 좀 보거라.”

어머니는 양희를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다. 아버지 살아 계실 때 한번인가 생굴이 밥상에 올랐는데 동생들이 냄새조차 맡기 싫어했다.

“몇 가지 것 더 사오지 그랬어요.”

양희는 봉투에 담긴 원피스를 생각하면서 말했다. 굴 봉지를 놓고 어머니가 파를 집어 들며 말했다.

“야야... 니네들이 힘들게 버는 돈인데 그러면 쓰겠냐? 나는 자식 돈으로 호강하는 창시 빠진 여자들이랑은 틀려야.”

자만심을 드러낼 땐 어머니 입에서는 어김없이 사투리가 나왔다. 어머니는 툭하면 궤변을 늘어놓았다. 양희가 똑바로 쳐다보자 어머니는 슬그머니 눈길을 돌렸다. 어머니는 파의 겉 이파리를 벗겨 낸 다음 곁의 무를 집어 들었다.

“무생채하게요?”

“아니 굴 무침에 넣을 거야. 보쌈처럼 먹으면 맛있잖냐. 고기는 삶아야하는데 시간이 없으니까 구워야지.”

게으른 걸로 치자면 따라올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몇 걸음 떨어져있는 변소에 다니는 게 싫어 부엌에 오줌을 누던 어머니였다. 오징어채볶음이나 어묵볶음처럼 한꺼번에 많이 해두고 먹을 수 있는 반찬을 선호했기 때문에 어머니의 음식솜씨는 예전에 비해 나아졌다고 볼 수 없었다. 바닥이 그슬린 냄비를 닦지 않고 사용하는 경우가 종종 있어 그릇마다 그을음 자국이 남곤 했다. 어머니가 깔끔해지기를 바라는 것보다 비싸게 먹히더라도 가스레인지를 쓰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었다. 상을 부엌바닥에 놓자 좁아서 마무리를 어머니에게 맡겨두고 일어서야했다. 김씨가 듣는 FM 방송의 소리가 듣기 싫어 부엌 문턱을 넘어섰다.

“왜 나가냐?” “애들 올 때가 되었잖아요.”

“그래, 그래라.”

어머니가 엉덩이를 일으키며 대답했다. 어머니는 이제 가냘픈 몸이 아니라 물이 오른 처녀처럼 탱글탱글한 젖가슴과 거들을 입어서 빵빵해진 엉덩이를 갖고 있었다. 언제 장만했는지 큼직한 보석이 매달린 목걸이 줄이 가슴 앞에서 대롱거렸다. 브래지어처럼 까만 빛깔의 보석이었다. 손톱에는 어느새 까만색 매니큐어가 발라져 있었다.

김씨가 집에 자주 들락거리면서 일찍 퇴근 하는 게 큰 부담이었다. 하필 방을 제공해 주던 사람이 멀리 이사를 가버려 화투판을 양희네 집에서 벌리곤 했다. 김씨는 화투꾼이 아니어서 괜히 끼어있는 셈이었다. 김씨는 야근을 하지 않는 날이면 간혹 양희네 집에서 저녁을 먹었다. 양희가 늦는 날이면 제과점의 빵봉지나 과자봉지만 눈에 띄기도 했다. 때로 김씨는 양희네 집 근처의 언덕길에 서 있기도 했다. 언덕을 올라올 때 양희는 항상 땅을 보고 걷기 때문에 김씨와 지척 간에 마주칠 때가 많았다. 쳐다보는 김씨에게 인사를 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조심해서 들어가라.”

김씨는 항상 그렇게 말했다. 부드러운 목소리였지만 양희의 몸에는 소름이 돋았다. 양희는 설치류처럼 빤질거리는 눈이 뒷모습을 핥고 있을 것 같아 뛰다시피 언덕을 타 오르곤 했다. 때론 아랫길에 서 있다가 아는 아줌마와 함께 올라오곤 했다. 양희가 누군가와 어울려서 오면 김씨는 몸을 돌려 먼 곳을 바라보는 척 하고 서 있었다. 그해 여름에는 김씨를 경계하느라 신경을 바짝 세우며 살았다. 집에 와서 김씨와 마주 치게 되면 방에 들어가지 않고 아이들 핑계로 바깥을 배회하다가 들어갔다. 김씨의 목소리만 들어도 진저리가 쳐졌기 때문에 늦은 시간까지 정류장의 의자에 앉아있기도 했다.

갈등의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양희 앞에 영섭이 모습을 드러냈고 숨통이 트이는 나날이 시작되었다. 그날 양희는 버스 의자에 앉아 바깥을 바라보다가 잠시 눈을 감고 있었다. 에어컨이 없어서 차내가 무척 더웠다. 목덜미에서 브라우스 칼라를 비집고 땀이 흘러내리고 있었지만 닦지 못하고 있었다. 손수건을 핸드백에 챙겨 넣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전날 김씨가 늦게까지 있는 바람에 양희는 옷장정리를 했고 가방에 있는 물건들까지 정리를 했다. 정리 중에 안방에 있던 김씨가 말을 시키는 바람에 건성으로 할 수밖에 없었고 출근길에 보니 가방에 수첩도 없었다. 수첩 뒤에 지폐를 넣고 다녔기 때문에 아차 싶었지만 동전지갑이 따로 있어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집에 돌아가면 수첩부터 챙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간혹 짤막하게 글을 적기도 했기 때문에 일기장 대용이라 할 수도 있었다. 그 내용을 김씨가 보면 절대 안 된다는 생각이었다. 김씨에 관한 좋지 않은 내용도 기록을 했기 때문에 불안했다. 빨간 불에 멈춰있던 버스가 신호가 바뀌자 움직였다. 차가 속력을 내면서 밀려들어온 바람에 젖은 목덜미가 시원했다.

“아가씨 이거 받아요.”

귀 가까이 대고 속삭이는 건 남자의 목소리였다. 아는 목소리였지만 목소리의 주인공이 너무 가깝게 있어서 양희는 눈을 뜨지 못했다. 양희의 핸드백 위에 손수건이 떨어졌다. 머리와 목덜미에 체온이 느껴지는 걸로 봐서 바짝 몸을 기울인 상태에서 손수건을 떨어뜨린 것 같았다.

“양희씨...”

그 소리에 겨우 눈을 뜨고 얼굴을 움직이면서 쳐다봤다. 양희의 눈을 확 비집고 들어온 건 미소였다. 덧니 하나 때문에 미소가 무척 부드럽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양희의 얼굴에서 붉은 빛깔이 사라질 때까지 영섭은 미소만 짓고 있었다. 핸드백 위에 떨어진 손수건을 천천히 쥐는데 기분이 이상했다.

“땀을 닦으시라고요.”

“고맙습니다.”

양희는 목 언저리를 땀을 닦고서 얼떨결에 손수건을 가방에 넣었다.

“이 차에 탈거라는 상상도 못했는데... 빨간 리본으로 머리를 묶는 사람은 양희씨 밖에 없거든요.”

영섭의 목소리엔 장난 끼가 배어 있었다. 흘러내리지 않도록 긴 머리를 끈으로 단단히 묶고 리본 핀을 형식적으로 꽂는 상태였다. 묶는 줄이야 늘어나면 바꿔야하지만 핀은 바꿀 이유가 없었다. 다시 얼굴이 화끈거리기 시작했다.

“아! 다 왔네. 일어나요.”

몇 정거장 더 가야하는데 영섭이 그런 식으로 얘기하는 바람에 양희는 엉거주춤 일어났다. 주변에 서 있던 몇 사람이 쳐다보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엉덩이에 땀이 배어있어서 붙어버린 치마를 손으로 떼어야했다. 구겨진 치마를 잡아당기면서 의자에서 빠져나왔다.

“여기가 어딘지 아시죠?”

건너편에 남대문 시장이었다. 간판들이 무질서하게 매달려 있었다. 서울에 온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어머니를 따라 왔다 혼쭐이 난 곳이었다. 잠이 쏟아지는 새벽까지 돌아다녀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그날은 요금 때문에 택시를 이용할 수가 없어 5시 반쯤 출발하는 버스를 타기위해 기다려야 했다.

그 날 양희는 보도블록에 쭈그리고 앉아 옷 보따리에 얼굴을 파묻은 채 엎드려 있었다. 여름인데도 한기가 드는 건 이슬이 내린 탓이었을 것이다. 어머니가 남대문 시장을 핑계 댈 때면 김씨네 집에서 자는 날이었다. 때론 어머니의 손에 옷 봉지가 있기도 했지만 때론 빈손이었다. 김씨가 떠오르자 양희는 영섭의 손을 꼭 잡았다.

“제가 여길 왜 왔는지 모르겠네요.”

양희가 중얼거렸다. 영섭은 대꾸를 하지 않고 싱글거리기만 했다. 횡단보도를 건너다 말고 양희가 걸음을 멈추자 영섭이 팔을 채다시피 걸음을 빨리했다. 신호등을 무시하면서 건너는 횡단보도의 몇몇 사람들 때문에 도로는 복잡한 상황이었다. 자세가 불안해서 기우뚱거리며 달리는 양희의 머릿속은 신호등이 고장 난 교차로처럼 복잡해지고 있었다. 양희는 그동안 어떤 일이 있었나 생각을 더듬기 시작했다.

직장에서 마주칠 때는 영섭과 인사만 하는 처지였다. 양희가 일하는 라인에 왔다가도 영섭은 다른 사람과 몇 마디 주고받다 갈 뿐이었다. 곁눈질 한번 주지 않았던 남자였다. 간혹 백열구가 끼워진 전등갓에 머리를 찧을 때면 영섭이 유난히 민망해 하기 때문에 양희는 다른 사람들처럼 웃지도 못했다. 그런 부분을 빼 놓고는 차분한 성격이라는 걸 양희는 알고 있었다. 양희는 가로수 옆에 다다르자 고집을 부리듯 서버렸다.

“함께 식사를 한지 딱 일 년이거든요. 회사에서 함께 일하는 처지인데 적어도 일 년에 한번 씩은 밥을 먹어야죠.”

“참내...”

어이가 없었다. 고작 그런 이유 때문에 차에서부터 잡혀 와야 했던 것이다. 게다가 회식자리에 대한 기억은 끄집어내기조차 싫었다. 모처럼 참석했던 회식자리였는데 술잔을 받아야만 했다. 잔을 한손으로 잡았다고 악담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핀잔을 들었던 것이다. 시선이 손으로 쏠려서 밥을 먹기는커녕 움직일 수도 없었다. 가까스로 벗어나서 찾은 곳이 화장실이었다. 하필 영섭은 그날 얘기를 하고 있었다. 양희는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꾹 다물었다.

“그 손수건이 일 년 만에 주인을 찾아가는 거예요.”

“예?”

양희는 손수건을 가방에 넣었다는 사실을 깜빡하고 있었다. 흰색 손수건을 여러 개 지닌 것은 너덧 장씩 묶어 싸게 팔기 때문이었다. 남자들도 무명천으로 된 흰 손수건을 들고 다니는 경우가 있어 손수건으로 땀을 닦으면서도 아무 생각을 하지 않았다. 게다가 당황했던 탓도 있었다. 그날 화장실에서 손수건으로 눈시울을 닦고 진땀도 닦았던 기억이 있었다. 분명히 가방에 넣었던 기억도 있었다.

“아마 손수건이 두 장이었나 봐요. 가방에서 꺼낼 때 떨어졌거든요.”

“아...”

화장실에서 들어서면 마주바라다 보이는 벽에 거울이 있었다. 키가 큰 남자라면 가리개 너머로 그 거울을 쳐다볼 수 있었다. 여자 화장실 앞을 지나서 남자 화장실이 있어 맘을 먹으면 볼 수도 있었다. 그러니까 영섭이 슬쩍 들어와서 바닥에 떨어진 손수건을 집어 갔다는 얘기였다.

“여자 화장실에 들어왔다는 말이군요.”

“글쎄요.”

말을 하면서 영섭이 멋쩍게 웃었다. 생각해보니 화장실 바닥에 떨어진 손수건을 주울 사람이 있을까싶었다. 주워서 쓰레기통에 넣을 수는 있다하더라도 빨아서 주인에게 돌려준다는 건 남자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그걸 일 년씩이나 들고 다녔어요?”

“뭐, 내 것이나 마찬가지였죠. 다만 돌려주겠다는 의무감을 잊지 않으려 애를 쓴 거죠.”

영섭의 얼굴을 쳐다보던 양희는 입을 손으로 가리고 쿡쿡 웃었다.

“얼굴에 뭐가 묻었나요?”

“아뇨. 화장실이 생각나서요.”

“호기심에 여자 화장실에 들어가는 사람 많아요. 너무 비약해서 생각하지 말아요.”

“정말요?”

“쉿 비밀이에요. 참, 양희씨는 뭘 좋아하세요?”

영섭이 가로수를 탁탁 때리자 매미가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다른 나무로 날아갔다. 가로수를 뚫고 지나가는 전선줄이 축 늘어질 만큼 무더운 날씨였다. 영섭의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히기 시작했다.

“칼국수 먹을게요.”

어머니를 따라 옷 쇼핑을 하던 날 먹었던 멸치 칼국수가 떠올랐다. 어릴 적 먹었던 호박죽처럼 질리지 않고 맛있었다.

“이 더운 날 칼국수를 먹어요? 어제가 중복이었다구요.”

“콩국수 먹을게요.”

얼굴이 빨개졌다. 실은 초복, 중복, 말복이라는 말을 자주 들었지만 언제쯤을 얘기하는지 양희는 알지 못했다.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누가 무슨 말을 하든 아는 체를 할 수가 없었다.

콩국수와 순대가 함께 나왔다.

“이집 순대는 어릴 적 어머니가 해주신 거랑 맛이 비슷해요. 만드실 때 쳐다보고 있었는데 재료가 엄청나게 많았어요. 마지막에 빨간 피를 부어 섞으면 어머니의 손이 무서웠어요. 어머니 오른손은 검지의 두 마디가 없거든요. 아버지는 어머니와 직접대화를 피하셨어요. 외면하면서 얘길 한다거나 아니면 저를 통해 얘길 하셨죠.”

얘기를 하다말고 국수 그릇을 양희의 앞쪽으로 바짝 다가오도록 밀었다.

“국수를 먹으면서 얘기하도록 하죠.”

영섭이 먼저 젓가락으로 국수를 집어 감았다. 국수를 입에 몰아넣고 오른쪽 검지를 치켜세웠다.

“오른쪽 검지가요. 맞선을 볼 때 어머니가 손을 오므리고 있어 아버지는 눈치를 채지 못하셨죠. 할머니는 중매인에게 들어 아시고 계셨지만 괜찮은 처녀라는 생각을 했기 때문에 결혼을 시킨 거죠. 아버지는 속였다고 해서 어머니를 평생 미워했어요. 나도 어릴 적에는 어머니의 손이 보기 싫었답니다. 저 못된 놈이죠?”

양희는 탁자에 올려진 왼손을 슬그머니 내려놓았다. 말을 멈춘 영섭은 부지런히 국수를 먹기 시작했다. 양희도 말없이 국수를 먹었다.

“이젠 아무렇지도 않아요. 어머니나 양희씨나... 손 좀 이리 줘 봐요.”

영섭의 국수 그릇은 벌써 비어있었다. 양희는 젓가락을 놓고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에이...괜찮아요. 이제야 저도 철이 드는가 봐요.”

영섭이 양희의 왼손을 잡아채듯 가져다가 두 손으로 잡고서 말했다.

“남대문 시장은 활기가 넘치는 곳이에요. 여기 와서 이것저것 둘러보고 필요한 걸 사는데 누구든 부지런만 떨면 잘 살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거든요.”

양희도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소주 때문에 얼굴이 불콰해진 영섭이 소년 같아 보였다. 미남형은 아니었지만 나이가 들어도 쉬이 늙지 않을 동그란 얼굴이었다. 사람들이 바쁘게 움직이는 모습과 생활고라는 단어를 연결시킬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생각은 자꾸 그 쪽으로 기울어졌다. 영섭이 재담을 섞기도 했지만 양희는 울적한 기분으로 바뀌고 있었다. 양희는 벌써 소주를 석 잔이나 비운 상태였다.

 

 

 

“양희야. 김씨가 소고기를 사주더라. 어제 밑반찬을 갖다 주니까 애들처럼 좋아하드니... 김씨는 아직 순진한 구석이 있어야. 총각이라서 다를 테지만.”

밥상 앞에 앉자 어머니가 김씨에 대한 얘기를 끄집어냈다.

“고맙네요.”

건드리기만 해도 쏟아지는 씨앗 주머니처럼 김씨의 말이 쏟아질 게 뻔했다. 양희는 입에 담긴 밥을 꿀꺽 삼키고 어머니의 말을 잘랐다.

김씨가 아이들에게 관심을 가지는 게 양희 때문이라는 걸 알 리가 없는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김씨가 양희에게 관심을 두기 때문에 다른 아이들에게도 잘 한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얘기를 하고 싶어도 단순한 성격이라서 오히려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가 있었다. 양희의 수첩에 ‘나 좀 미워하지 마’ 라는 내용의 글귀를 적은 후 김씨는 더욱 노골적이었다. 어머니는 생각하는 게 워낙 단순하기 때문에 그 내용을 알리게 되면 양희에게 의심을 눈초리를 보낼 수도 있었다. 양희는 글귀를 볼펜으로 박박 그어 버리고 말았다. 나름대로 고충을 기록했기 때문에 수첩의 다른 내용도 오해의 소지가 많았다.

어머니는 이야기를 더 이어가고 있었다. 양희는 김씨 얘기가 듣기 싫어 텔레비전 볼륨을 높였다. 젓가락을 문채 화면만 쳐다보는데 어머니가 팔을 툭툭 쳤다.

“내가 이년 이상 지켜봤지만 다시없는 사람이드라. 너희들도 복 받은 거다.”

얘기하는 의도는 알 것 같았지만 코웃음을 치고 싶었다. 게다가 김씨가 집요하게 양희의 주변을 맴돌았기 때문에 항상 벼랑 끝에 선 기분이었다. 간혹 울리는 전화를 받으면 거의 김씨였다.

“어머니한테나 그렇겠죠.”

“너, 오늘 이상하구나. 그게 무슨 소리냐?”

“오늘 회사에서 안 좋은 일이 있어 기분이 찜찜하니까 그만 얘기하세요.”

의아하다는 어머니의 표정이 안도감으로 바뀌자 양희는 젓가락질을 빨리했다. 양희가 전화를 서둘러 끊으면 그게 오히려 빌미였다. 다시 전화를 해서 이것저것 따졌다. 동생들이 전화를 받아도 양희에게 수화기가 넘어왔다. 김씨는 어머니와 함께 있을 때에도 양희에게 전화를 했다. 옷에 대한 시비였다. 근무하는 곳에 남자가 많으니 조심을 해야 한다는 말을 했고 때로는 결혼할 때까지 순결이 의무라는 말도 했다. 아예 대꾸를 하지 않으면 네가 딸 같아서 그런다는 말을 입에 올리기도 했다. 어머니는 김씨와 쇼핑을 가면 때론 양희의 속옷까지 덤으로 챙기곤 했다. 늘 제과점에 들러 빵이나 과자를 사오는 건 다른 아이들에 대한 배려라고 할 수 있었다. 잔머리에 능한 남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그 집에 가서 살지 그래요?”

“뭐? 김씨 얘기만 나오면 너는 기분 나빠하더구나. 내가 남자 사귀는 게 그리 못마땅하냐? 재가도 못하고 너희들 뒷바라지만 하며 사는 것 보면 가슴이 안 아퍼? 하긴 너도 시집 가보고 애도 낳아봐야 내 속을 알지. 쯧쯧...”

더 말이 이어져봐야 어머니 입에서 곡성이 터져 나올 게 뻔했다. 며칠 전 김씨의 행동은 성폭력에 가까웠다. 김씨는 동생들과 어머니가 없다는 걸 귀신처럼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 양희는 부엌에서 샤워를 하고 있었다. 분명 문고리를 걸었는데 문이 스르르 열렸다.

안방에서 흘러나오던 텔레비전의 소리 때문에 생긴 일일 수도 있었다. 양희는 가수가 부르는 노래를 따라 흥얼거리고 있었다. 비누칠을 끝낸 양희는 때수건으로 몸을 문지르고 있었다. 무슨 소리가 났는가 했는데 김씨가 부엌 안으로 들어 와 있었다. 백열등이 밝지 않아 김씨의 모습이 마치 그림자 같았다.

“뭐하는 거예요?”

소리를 지를 수도 없었다. 아는 처지라는 게 그만큼 어려웠다. 양희는 수건으로 몸의 앞부분만 가렸다. 김씨가 보일러 고장이라며 겨울에 자고 갔던 날을 양희는 기억하고 있었다. 할 수 없이 동생들과 넷이 한방을 썼지만 방이 좁은 것보다 요란한 섹스 소리가 오히려 끔찍했다. 밀어내는 듯한 동작을 취하다 간지럽다며 히히덕거리는 어머니나 유난히 절정 끝에 어흑 소리를 반복하는 김씨의 목소리도 끔찍했다. 양희는 정수의 귀에 막내가 쓰는 귀마개를 갖다 붙이고 숨을 죽였다. 고단한 탓에 정수는 귀마개를 쓴 건지 어쩐지도 모르고 잠에 빠져 있었다.

“미안하다. 니 엄마인 줄 알았어.”

“나가세요.”

“그래그래...알았어. 이건 놓고 가야지.”

들고 있던 종이 봉지를 들고 방안으로 성큼 들어서던 김씨가 물었다.

“옷은 거기 있어?”

속옷만 못에 걸어 놓았기 때문에 없다고 할 수 밖에 없었다.

“문 앞에 옷 놓는다. 잠간 전화 좀 써도 되니?”

대답을 하기도 전에 김씨는 다이얼을 돌리고 있었다. 어머니와 통화를 하는 것 같았다.

“집에 와 있을 거라면서... 양희만 있네. 양희 고단한데 일찍 와서 밥이나 차려주지 않고... 내가? 그럴까? 짜식이 속이 차서 미안해 할 거야. 헤헤...뭘...얼른 와. 기다릴께. 빨리 안 오면 엉덩이로 쳐들어간다.”

언어를 다루는데 순발력이 있는 걸 보면 절대 단순한 남자는 아니었다. 어머니는 결혼이라도 할 것처럼 호들갑을 떨곤 했지만 양희의 생각에는 상황이 그렇게 흘러갈 것 같진 않았다. 통화의 내용에는 어머니가 집에 일찍 온다는 뜻이 담겨 있었다. 너무 나쁘게만 생각하는 것 같아 옷을 입고 반찬을 챙겨 상에 놓았다. 학원과 보충학습 때문에 아이들은 늦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엄마가 나더러 밥 차려 주라고 하던데...”

상을 들이밀자 김씨가 웃음 띤 얼굴로 양희를 마주 보았다.

“내가 밥은 차려줄게. 밥통에 주걱은 있나?” 오랫동안 혼자 살았는지 밥을 그릇에 봉긋하게 담는데도 그릇의 가장자리가 깔끔했다. 무릎걸음으로 밥상 앞에 다가가는데 방바닥과 피부가 붙어버린 것처럼 잘 움직여지질 않았다. 양희는 젓가락을 쥔 채 꿇은 무릎 위에 두 손을 놓고 김씨가 첫술을 뜨기를 기다렸다.

“흠...샴푸 냄새 좋다. 밥맛이 좋아지겠는 걸.”

김씨는 눈을 지그시 감고 콧소리를 내며 숨을 들이쉬었다. 양희는 젓가락을 들고서 몸을 바짝 오그려 앉았다.

“아이고 내가 잡아먹기라도 하나? 자세 좀 펴라 .”

김씨가 눈을 흘기면서 밥상에서 물러나 앉았다. 벌써 밥 한 그릇을 비운 상태였다. 양희는 몇 숟가락 더 뜨다가 밥상을 밀치면서 일어났다.

“시장할 텐데 그거 밖에 안 먹어?”

“많이 먹었어요.”

대답을 하면서 시계를 쳐다보았지만 부질없는 짓이었다. 정수는 야근을 하는데다 아이들은 방과 후의 학습이 끝날 시간이 아니었다. 어머니가 늦는다는 게 더 큰 부담이었다.

“오늘은 내가 치울게. 니 어머니가 늦으니 내가 미안해진다. 나 설거지도 잘하거든.”

양희가 뭐라고 답하기도 전에 김씨가 일어나더니 부엌으로 나갔다. 수돗물이 떨어지는 소리에 비해 설거지 소리는 조용했다. 김씨는 문턱에 올라서서 못에 걸린 수건에 손을 닦았다.

“참... 너 책 사 볼래?”

건넌방에서 메모를 하고 있던 양희는 무슨 소리인지 알아듣지 못해 고개를 들었다. 김씨의 손에 돈이 들여 있었다,

“무슨 돈이에요?” “너희 집에는 읽을 책이 별로 없어. 네 나이라면 문학전집은 아니더라도 좋은 책을 읽어야 하는 거야.” 양희는 얼굴이 붉어졌다. 집에 있는 소설책 몇 권은 서점에서 양희가 고른 것이었다. 김씨는 간혹 소설이나 시에 관한 얘기를 하면서 이해하기 힘든 표현을 쓰기도 했다. 양희는 중학생 국어책을 들여다보면서도 어려움을 느낄 때가 있었다. 양희는 차갑고 매끈한 새 돈을 받아들고서 만지작거렸다. 세어보지도 못하고 인수의 책상위에 놓았다.

“영화를 보는 것도 괜찮을 거야. 나는 네 나이 무렵엔 책벌레였지.”

김씨가 진지하게 얘기하니까 마음은 좀 느긋해졌지만 눈으로는 벽시계를 계속 흘끔거리고 있었다.

“네 얼굴은 남정임이랑 비슷해. 약간 뒤집어진 윗입술과 흰 피부가 말야.”

양희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던 김씨가 왼손으로 양희의 오른 팔을 잡았다. 낚아채자 양희의 몸이 소용돌이 속의 물살에 빨려 들어가듯 김씨의 품에 갇혔다. 김씨가 반대쪽 손으로 양희의 뒤통수를 잡아당기면서 자신의 얼굴을 잽싸게 가져다 댔다. 양희의 다문 입술이 김씨의 입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손을 잡았던 김씨의 팔이 재빨리 엉덩이로 내려갔다. 손가락이 항문 사이를 비집더니 음부까지 닿았다. 입술을 게걸스럽게 빨아 대서 침 냄새에 구토가 날 지경이었다. 손가락으로 팬티 위를 더듬고 있어 음부를 손톱이 콕콕 찍어대고 있었다. 양희는 있는 힘을 다해 남자를 밀어냈다. 입술은 떨어졌지만 팬티가 찢어지는 소리를 냈다.

“이제 뭔 짓이죠? 소리를 지를 겁니다.”

눈을 크게 뜨고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뭐라고 지를 건데?”

김씨가 입술 끝을 약간 비틀어 웃었다. 김씨는 다시 양희의 엉덩이를 완강하게 끌어당겼다. 딱딱하게 선 성기가 하반신의 중앙에 닿았다.

“니가 좋아서 그러는 거야.”

김씨는 말을 하면서도 양희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럼, 어머니는 뭔데요?”

“니 어머니도 좋아해. 니가 착해서 이렇게 안아주고 싶었어.” 김씨의 몸 어느 부분에서 기름 냄새가 올라왔다. 몸이 경직되고 머릿속이 하얗게 되어버리는 것 같았다. 양희가 손을 뒤로 돌려서 김씨의 손등을 긁었다. 약하게 신음소리를 냈지만 김씨는 손을 빼지 않았다. 그때 부엌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김씨가 손을 빼더니 부리나케 안방으로 갔다. 막내 인수가 부르는 소리에 양희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안녕하세요?”

“응, 이제 오는구나. 들어 와.”

“누나 뭐해?”

양희가 아무 말도 없자 인수가 소리를 질렀다. 양희가 건넌방에서 대답을 하자 그때서야 인수는 문 앞에 가방을 놓았다. 양희는 눈시울을 닦고 부엌으로 나왔다. 김씨는 양희를 곁눈질하더니 밖으로 나갔다.

“누나... 아저씨랑 밥 먹으니까 맛이 없었지?

“그래...”

양희는 예전처럼 인수의 얼굴을 씻겼다.

“에이... 나도 이제 중학생인데...”

인수가 물에 젖은 얼굴로 눈을 흘기자 양희는 웃는 척 하면서 수건을 내밀었다. 눈물이 흘러나온 것을 보이지 않기 위해 대야의 물을 버리면서 윗옷 끄트머리를 잡아당겨 눈을 닦았다. 인수를 따라 들어간 김씨가 돈을 내미는 것 같았다. 고맙다는 말이 들려서 부엌에 있을까하던 양희는 방문 앞으로 갔다.

“안 돼!”

“무슨 소리냐?”

양희의 언성이 필요 이상으로 높았던지 밖에서 들어오던 어머니가 참견을 했다.

“아니에요.”

양희가 얼른 대답을 했고 인수는 양희와 어머니를 쳐다보면서 돈을 잡은 손을 배 근처에 대고 있었다.

“돈 받았어? 그럼 고맙다고 해야지.”

“벌써 했지. 학용품 사는데 보태 써라. 인수는 공부를 잘하니 오히려 아저씨가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다. 당신도 얼른 들어와서 밥 먹지.”

김씨가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하면서 가벼운 웃음소리를 냈다. 당신이라는 말에 양희는 주먹을 불끈 쥐고 가슴을 꽉 눌렀다. 김씨는 걷었던 남방의 소매를 내리고 있었지만 손톱에 긁힌 자국을 다 가리진 못했다.

“이 상처는 뭐야?”

“아... 오늘 기계에 다쳤어.”

“큰일 날 뻔 했네. 연고라도 바르지.”

“아냐. 어서 인수랑 밥이나 먹어. 나는 이제 가야지. 담부터는 일찍 일찍 들어와. 얼굴도 못보고 갈 뻔 했잖아.”

사근거리는 말투에 기분이 좋아진 어머니는 김씨의 어깨를 주물렀다.

“내일 아침에는 국 맛있게 끓여줄게.”

“나 바뻐, 오늘은 누나가 올지도 모르는데... 당신이 빨리 올 거라 생각하고 그 말을 하지 않았거든.”

어머니는 김씨가 나가자 따라 나셨다. 예전 같으면 자고 가겠다는 말을 농담처럼 했겠지만 양희의 눈치를 봤다. 어머니는 아쉬운지 자고가라는 말을 하면서 따라 나가다가 돌아왔다. 외출복을 갈아입지 못했다는 것에 대해 자괴감이 들어 양희는 재빨리 추리닝으로 갈아입었다. 팬티도 갈아입어야 했지만 그럴만한 상황은 아니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쓰레기 봉지에 담아 버리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양희는 옷을 입은 채 누웠다. 하반신이 욱신거리는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인수가 피곤하냐고 물었을 때 조금이라고 대답하고 몸을 돌려 벽을 바라봤다.

이상 기류를 전혀 감지하지 못한 어머니는 옷을 갈아입다가 책상 위에 있는 돈을 발견했다. 침을 발라가면 세는 소리가 들려서 어머니를 쳐다보았다. 어머니는 볼이 터질 것 같은 웃음을 담고 있었다. 어머니와 인수가 식사를 마치자 양희는 벌떡 일어났다.

느티나무까지 가는 동안 연신 손으로 눈시울을 닦았다. 나무 밑둥치 근처의 맨바닥에 앉았다. 별빛은 희미했고 현란한 빛깔의 불빛들이 쏟아진 구슬처럼 도심 사이사이에 박혀 있었다. 불빛은 곧 커다란 동그라미가 되었고 곧이어 색이 뒤범벅이 되었다. 초등학생일 때는 하늘의 별을 보면서 미래에 대해 막연한 기대감도 갖곤 했었다. 이제 와서 보자면 그건 허황된 꿈에 지나지 않았다. 때론 희노애락의 표현까지도 절제해야만 했다. 생각해보니 밟히면 지렁이처럼 꿈틀하는 정도의 인생에 불과했다.

눈물이 멎질 않아서 일어 설 수가 없었다. 겨우 마음을 추스르고 일어서는데 엉덩이에 감각이 없었다. 집으로 돌아 왔을 때 야근을 마치고 온 정수와 부엌에서 마주쳤다. 백열전구가 밝진 않았어도 양희의 얼굴이 달라졌다는 것을 모를 리가 없었다. 입을 열려던 정수는 말을 삼키면서 들고 있던 수건으로 얼굴을 박박 문질렀다. 문턱을 밟고 올라서자 텔레비전을 보던 남수가 양희를 힐끗 쳐다보았지만 말은 하지 않았다. 건넌방 책상 앞에 앉아있던 인수가 쳐다볼까봐 얼른 부엌으로 나와서 세수를 했다. 모처럼 부엌을 깨끗이 치운 어머니는 이미 잠들어 있었다.

“모양이 별처럼 생겼네. 가슴에 별을 담고 있으니 양희씨 몸은 우주라고 할 수 있지”

젖가슴 사이의 골을 문지르면서 영섭이 웃어보였다.

“우주가 아니라 미리내...”

양희가 얼른 대답했다.

“미리내?”

“응...인수가 가르쳐 주었어. 은하수가 미리내라고...”

영섭이 끄덕거렸다. 팔을 베고 있는 양희의 속눈썹이 깜빡거렸다. 잔털이 많은 피부에서 소녀티가 풍겼지만 영섭의 관점에서 바라보자면 양희는 순수하면서도 독종이었다. 있으나마나한 어머니를 대신해 가정을 끌어가는 솜씨가 탁월했다. 양희의 입을 통해 어머니를 원망하는 말을 단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었다.

“손은 어쩌다 이렇게 되었대?”

“나도 모르지 머. 죽 솥에 손을 짚었다는 소리만 들었어. 가난하니 치료를 제대로 못해서 이리 되었겠지. 구두공장에 와서 이놈을 혹사 시키니 미안해 죽겠어. 게다가 외출할 때는 늘 호주머니에서 지내야 하잖아. 엄청 불공평한 일이지.”

양희가 영섭을 쳐다보면서 눈웃음을 지었다. 영섭은 양희의 얼굴을 뜯어보았다. 눈은 크지 않았지만 입술선이 뚜렷하고 턱이 갸름해서 단아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다만 뼈가 가늘고 몸이 호리호리해서 안쓰러운 느낌이 들 때가 많았다.

“내가 군대 가더라도 마음 꿋꿋하게 먹고 살아야해. 난 언제나 그 자리에 있을 거야” 영섭이 양희의 등과 팔을 쓰다듬었다. 따뜻한 마음에 비해 지나치게 차가운 피부였다. 마치 파충류의 피부처럼 물기를 머금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영섭이 양희를 사랑한다는 것은 모험이었고 인내를 필요로 하는 일이었다. 오랜 세월 어머니를 바라보면서 영섭이 얻은 결론이었다.

양희도 생각에 잠긴 영섭을 쳐다보았다. 영섭의 부모를 만나야 하는 과제가 남아 있었지만 방금 나눈 섹스가 후회되는 건 아니었다. 몸의 주인이 자신이기 때문에 누구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으며 의지대로 하면 되는 일이라는 생각이었다. 만약 영섭과 결혼이 되지 않는다면 혼자 살 자신도 있었다. 어머니의 의타심이 온 가족을 힘들게 했기 때문에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말자는 게 양희의 신조였다.

“많이 아팠지?”

영섭이 소곤거리자 양희의 얼굴이 빨개졌다. 잠시 김씨와의 상황이 머리를 스쳐갔고 어색했던 섹스 때문이었다. 영섭 앞에 알몸을 내보이기가 쑥스러웠다. 영섭도 옷을 다 벗지 못했다. 두 사람 다 셔츠 없이 아침에 출근할 수밖에 없었다. 양희는 일어나서 선혈이 점점이 묻어있는 두 장의 런닝셔츠를 가방에 집어넣었다. 갑자기 허탈해지면서 눈빛이 흐려졌다. 양희는 천천히 일어났다.

“나, 씻고 올께.”

“응...얼른하고 자.”

영섭은 피곤한 듯 눈을 반쯤 감고 있었다.

“절대 후회하진 않을 거야.”

잠든 영섭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김씨를 떠올리면서 하는 말이었다. 김씨는 양희를 노리는 천적이었다. 양희의 삶에 보호막이 없었기 때문에 집요하게 배회하는 김씨를 따돌릴 재간이 없었다. 위기에 몰린 운전자처럼 영섭 쪽으로 핸들을 꺾어야했다. 입을 약간 벌리고 자는 영섭은 피곤한 듯 숨소리가 거칠었다. 양희는 영섭의 입술에 손가락을 잠시 대었다가 뗐다.

섹스 후의 갈등은 예견된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영섭 앞에서 절대 그런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리라 마음먹었다. 영섭의 태도는 사랑보다 동정에 가까울 수도 있었지만 상관없었다. 가족에게 기대를 하지 않듯 남자에게도 기대를 하지 않으면 된다는 생각이었다. 어머니에겐 통행금지에 걸렸다는 변명을 하겠지만 영섭과의 관계를 다 털어 놓을 예정이었다. 김씨의 귀에 흘러들어 가야만 할 내용이기도 했다.

어머니는 항상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가미를 해야만 하는 사람이었다. 며칠 후 영섭이네 아버지는 사업가로 둔갑해 있었다. 어머니는 무슨 의도에서였는지 김씨와 함께 집에 들어서면서 그런 말을 끄집어냈다. 김씨는 가당치도 않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그 집에서 양희의 손을 보고도 좋아한대?”

김씨의 목청이 높았다. 양희는 로션을 마저 바르지 못하고 옷에 닦았다.

“자식 이겨먹는 부모는 없다 하잖아. 나는 영섭이 만큼 똑바른 사람도 별로 못봤네요.”

“병신 며느리를 볼 시부모는 흔한 줄 알아?”

듣기 거북했던지 어머니는 한참 입을 다물고 있었다.

“내게 인사도 왔었어. 군대 다녀오면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양희랑 살 거라고...양희나 영섭이나 첫정이어서 소중하대.”

이번에는 김씨가 입을 다물었다. 양희는 침묵의 의미가 무엇인지 짐작이 갔다. 그날 김씨는 슬그머니 사라졌다. 어머니는 땅바닥에 던져버린 종이 백을 인수 손에 들려줬다. 인수는 메이커 운동화를 꺼내보고는 입을 크게 벌렸지만 양희나 어머니는 웃음을 보일 수가 없었다. 어머니는 일찍 자리에 누운 양희를 힐끗 쳐다보고 말았다. 전화기의 버튼을 두 번이나 반복해서 누르던 어머니는 수화기를 놓아버리고 자리에 누웠다. 어머니의 한숨소리는 잠이 들면서 끝났다.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무는 바람에 양희는 12시가 넘어서야 잠이 들 수 있었다.

입대를 하기 전 양희는 영섭과 일박 이일 여행을 했다. 9월 중순쯤이었다. 밤기차를 탔기 때문에 새벽에 동해에 도착을 했고 일출부터 봤다. 바다 뒤쪽에서 해가 올라오는 걸 보면서 지구가 어떻게 둥글 수가 있을까하는 생각을 했다. 영섭은 양희의 질문에 미세한 부분까지 설명을 했다. 설명을 듣다보니 먼 바다 쪽의 배들이 좀 더 낮은 위치에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수평선에 깔린 구름을 비집고 해가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마치 해가 구름과 유희를 즐기는 듯 했다. 민박집이라는 푯말에는 화살표가 그려져 있었다. 화살표가 맞나 싶을 정도로 골목길이 구불거렸고 중간 중간에 계단도 있었다. 집집마다 빨랫줄에 오징어를 매달아 놓아서 발효식품처럼 멀리까지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소주와 오징어를 사들고 들어가는 그들을 기다리는 민박집은 썰렁했다. 비수기라서 청소도 안 된 상태였다. 이층으로 올라가 집안을 들여다보던 그들은 다시 이층의 마당으로 나왔다. 마당에는 평상이 놓여 있었다. 햇살이 비쳤기 때문에 거기에 앉아 소주를 마셨다. 밀려온 파도가 남긴 포말이 바위를 적시면서 사라지는 게 멀리서도 보였다. 햇살에 바다의 일부분은 희게 반짝 거렸고 머물고 있는 배들은 한가로워 보였다. 바다에 긴 꼬리를 남기면서 달리는 배도 있었다.

꼬박 밤을 새운 상태라 취기가 빨리 돌았다. 양희는 슬래브 형태의 민박집을 둘러보았다. 동쪽 벽면을 따라 해가 비쳐들고 있었다. 담 그늘 때문에 볕이 가까스로 닿는 곳에 투박한 질그릇 화분이 놓여 있었다.

“저 화분 좀 봐. 우리 집 부엌 앞에 있는 것처럼 패랭이꽃을 심었어. 저건 꽃이 떨어질 때쯤 보면 꼭 내 꼴 같거든. 그래서 화분이 금갔는데도 못 버리고 있어.”

양희가 우울한 표정으로 말했다.

“분갈이 하면 되지. 아니다. 저건 모래땅에서도 꿋꿋하게 살아가는 식물이니 분갈이도 필요 없겠다. 어릴 적에 나는 저걸 카네이션과 혼동했어. 많이 닮았잖아.”

“그러고 보니 닮은 것 같네. 난 야산에 피는 꽃이나 잘 알지 책에 나오는 꽃은 잘 몰라.”

양희가 든 소주잔이 출렁거렸다. 영섭이 양희를 안고 어깨를 두들겼다. 둘은 술을 마시다 말고 부둥켜안은 채 쓰러졌다. 평상에서 잠들어도 될 만큼 따뜻한 날씨였다.

 

 

비가 오는 토요일이었다. 버스에서 내렸을 때 보도블록에는 행인이 많지 않았다. 계절이 가을의 중턱이라서 늦은 시간이 아니었어도 올라오는 골목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누군가가 양희를 쳐다보고 있었지만 눈을 내리깔고 있는 양희는 알지 못했다. 게다가 추리닝에 매달린 모자를 쓰고 있어서 봤다 해도 누구인지 금방 알아챌 수는 없었을 것이다. 양희는 느티나무를 그대로 지나치려는 중이었다.

“거기 서봐.”

어투가 명령조였다. 양희가 선 곳은 나무의 가장자리 그늘이었다. 초저녁부터 부슬거리던 비가 나무를 흠씬 젖게 했기 때문에 나무 아래쪽으로는 굵은 빗방울이 간헐적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남자의 몸은 길 아래쪽을 향해 있었고 고개만 왼쪽으로 돌린 상태였다. 가로등이 얼굴에서 비껴나 있었다. 남자를 빤히 쳐다보던 양희는 흠칫 떨었다. 김씨는 양희와는 달리 머리부터 바지까지 푹 젖어 있었다. 양희가 침묵을 지키자 김씨가 다시 입을 떼었다.

“물간 처녀와 여기서 만나는군.”

김씨의 오늘 쪽 입술 끝만 천천히 올라갔다. 김씨는 오른 주먹으로 왼쪽 손바닥을 탁탁 소리가 나도록 쳤다.

“저, 올라가겠습니다.”

양희는 시선을 내려 깔고 조용하게 말했다 탁탁 소리가 멎었다.

“병신 주제에...”

김씨가 앞으로 몸을 약간 구부린 채 오른쪽 발을 들어 나무를 차면서 뱉는 소리였다. 나무의 이파리에서 물방울이 우두둑 쏟아지면서 이파리도 같이 떨어졌다.

“말, 삼가세요.”

“육갑떨고 있네. 지랄염병...”

김씨가 가래를 카악 뱉어 내자 양희는 재빨리 몸을 돌렸다. 몸이 부들부들 떨렸지만 아래쪽에서 올라오는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익었기 때문이었다. 가로등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양희도 우산이 없었지만 두 여자의 손에도 우산이 들려있지 않았다. 김씨와 밤에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도 좋지 않은 소문이 될 수도 있었다.

“니 에미나 너나 더러운 년들이야.”

김씨가 낮게 중얼거리는 것 같았지만 양희의 귀에 선명하게 들렸다. 행인들과는 약간 거리가 있었고 그들은 얘기 중이어서 다행이었다. 몇 분 정도 행인들을 뒤따라가던 양희는 걸음을 멈췄다. 그대로 물러 설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내려갔을 때 느티나무 아래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여러 갈래의 길인 그 주변을 뒤졌지만 사람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집을 알고 있다면 찾아가고 싶은 심정이기도 했다. 한 삼십 여분을 그렇게 헤매었던 것 같았다. 젖은 몸이 춥다는 신호를 보냈을 때서야 양희는 시간이 늦었다는 생각을 했다. 벌써 불이 꺼진 집도 많았다.

느티나무 아래에 있는 장판이 깔린 평상에 털썩 주저앉았다. 물이 질펀하게 깔려있어 엉덩이와 사타구니를 마치 웅덩이에 담근 것 같았다. 줄줄 흐르는 눈물을 훔치면서 소리가 터져나올까봐 입술을 물었다. 집으로 올라오는데 젖은 신발 때문에 발뒤꿈치와 발가락이 아팠다. 열두시가 거의 되었을 무렵 어기적거리면서 집에 도착했을 때 웬일로 어머니가 문을 열어 주었다.

“아까 영섭이가 전화를 했어. 늦어서 나도 걱정 했다.”

평소와는 달리 어머니는 차분해져 있었다. 그 이유는 며칠이 지나서야 알았다. 어머니가 없는 틈을 타서 인수가 자초지종을 얘기를 했기 때문이었다. 김씨는 느티나무 아래서 곧장 집에 들어가 어머니에게 전화를 했던 것 같았다. 김씨가 양희와 영섭의 성관계에 대한 불쾌감을 드러내었고 어머니는 그걸 호의로 받아들였다. 김씨의 의도를 눈치 채지 못한 어머니는 결국 욕설까지 주고받았다. 어머니의 입에서 미친놈이라는 말이 튀어 나왔다는 건 그쪽에서 먼저 욕을 했다는 증거였다.

어머니는 이튿날 김씨를 찾아갔고 문전박대를 당했다. 그 후 김씨는 이사를 하면서 전화번호까지 바꿔버렸다. 어머니와의 관계가 끝났음을 의미했지만 어머니는 이유를 알지 못했기 때문에 김씨가 다니던 제철공장에 갔다. 주변에 있던 남자들의 힐끗거림을 감당할 수 없을 때서야 어머니는 상황을 감지했고 되돌아서야했다. 김씨가 더 이상 양희를 입에 올리지 않았기 때문에 어머니는 이유 없이 버림 받은 셈이었다.

얼마 되지 않아 인수는 김씨의 편지를 양희에게 전했다. 김씨에게 수모를 당하던 날 얻은 감기가 몸을 빠져나가기 전이었다. 어머니에게 알리지 말라고 했다는 말을 슬쩍 던지던 인수는 편지의 내용이 궁금한지 옆에 잠자코 서 있었다. 양희는 안부편지네, 라고 혼잣말을 하면서 쓱 훑어보고 호주머니에 넣었다. 인수가 나가자 주머니에서 꺼내어 눈으로 훑었다.

김씨는 양희의 자궁을 탐했을 뿐이었지만 편지에서는 사랑이라는 언어로 그 욕망을 미화 시키고 있었다. 편지에서도 자존심을 지키려고 애를 쓴 흔적이 보였다. 편지를 읽고 난 양희의 입가에는 냉소가 흘렀다. 잔기침을 하던 양희는 편지에 가래를 뱉었다. 편지를 반으로 접어서 잘게 찢었다.

부엌 하수구 뚜껑을 열고 과자부스러기처럼 찢겨진 편지를 밀어 넣었다. 수도꼭지에 매달린 호스를 틀어 편지쪼가리를 흘려보냈다. 생각해보니 김씨 스스로가 떠나갔다는 게 의미심장한 일이었다. 이제 김씨와의 일은 훌훌 털어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김은숙   2009-06-27  





이 홈페이지의 저작권은 김은숙에게 있습니다. Copyright(C)2006 Kimsooklove.co.kr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