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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필리핀 여행기 - 세부


 

 

 

 

 

 

   보홀의 선착장 대기실에서 세부의 호텔에 전화를 하던 딸은 예약 날짜가 달라서 애를 먹었다. 필리핀인과 영어로 통화를 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닌 듯 했다. 하지만 통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일이 잘 해결되었기 때문에 세부항에 도착할 때까지 마음이 편할 수 있었다. 대화가 쉽지 않은 것을 보면서 딸이 미국이라는 나라에 가서도 나름 고생을 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필리핀 하면 세부가 떠오를 정도로 세부는 한국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다. 필리핀에는 나름 유명한 세부 퍼시픽이라는 항공이 있으며 우리나라에서 세부로 가는 직항 노선이기도 하다. 인천뿐만이 아니라 부산에서도 갈 수 있는 곳이니 세부라는 도시는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질 수밖에 없겠다.

                                

세부항에서 픽업을 하던 사람은 60대 초반 정도의 남자였는데 다리를 약간 절고 있었다. 하지만 세련된 영어를 구사해서 호감이 갔다. 그가 끌고 온 승합차는 깨끗해서 고급스러워 보였다. 그는 Sampaguita suites 호텔의 픽업기사였다. 여행 책자에 수록이 되어있지 않은 그 호텔은 신축건물이었다.

픽업비가 따로 없었고 숙박 요금도 저렴했는데 방이 매우 깨끗했다. 다만 세부의 다운타운에 위치해 있어서 결코 아름답지 못한 주변 풍경을 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그 점을 고맙게 생각한다. 필리핀이라는 나라가 안고 있는 문제점을 제대로 볼 수 있었으니까.

 

도착 시간과 점심시간이 맞물려 있어서 밥을 먹기 위해 나왔다. 페인트칠이 벗겨진 흉물스러운 건물들이 길가에 늘어서 있었다. 길가에 누워서 낮잠을 자고 있는 거지들도 눈에 띄었고 가끔씩 양초를 사라며 손을 내미는 아이들이 앞을 가로 막기도 했다. 주변에 매우 오래된 산토니뇨 성당이 있었는데 아마 많은 관광객들이 그 성당에서 미사를 드리는 것 같았다.

성당 가까운 곳에 원형 지붕의 석조 건물이 있었고 우리는 그곳에서 사진을 찍었다. 그 석조건물은 마젤란의 십자가가 모셔져 있다. 그 주변에는 음식을 파는 곳이 흩어져 있었는데 관광객 또한 많았다. 더러 가이드를 따라다니는 한국 사람들이 눈에 띄기도 했다. 여행사 가이드를 따라 다니는 여행은 편하지만 시간을 마음대로 조정할 수가 없고 디테일한 여행이 되기 어렵다. 하지만 자유여행은 영어 회화에 능해야만 할 수 있겠다 싶다. 필리핀이 영어권이라 해도 영어에 서툰 필리핀인이 많은데다 방언 탓인지 발음도 영 이상해서 애를 먹을 수밖에 없었다. 호주 여행 때는 겪지 않았던 불편함이었다. 불편함을 겪을 때면 가이드를 따라 다니는 게 편하긴 하겠다 싶었다.

나의 경우 아이들과 다니지만, 이십대의 자식들을 따라 다닌다는 것도 쉽진 않은 일이라 생각한다. 아이들의 의견을 좇아야 하며 체력이 다소 딸리더라도 아이들과 함께 움직여야만 하니까. 술집이나 식당에 가서도 서로 불편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혼자 숙소에 있다면 그건 더욱 서글픈 일이 아닐까? 그런 이유만으로도 나이가 든 한국인들이 자유여행을 선택하는 경우는 별로 없을 것 같다. 가이드들이 자식보다 훨씬 친절하니까.

필리핀은 인구 밀도가 높으며 매우 빈곤한 나라이다. 좁은 집에 대가족이 함께 사는 경우가 많은데 그런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곳이 세부의 다운타운일 것이다. 재래시장이 포함된 다운타운을 구경하는 동안 필리핀의 문제점을 익히 알아버렸다.

 

유치원생 정도밖에 되어 보이지 않는 애들이 구걸을 하거나 물건을 파는 모습은 가슴이 아픈 일이었지만 “노”라고 단호히 자를 수밖에 없었다. 줄줄이 나타나는 아이들과 입씨름하기 싫었기 때문이었다. 시장을 둘러보다 우연히 지나게 된 골목의 풍경은 전쟁이 끝난 후 지어진 판자촌 같았다. 손바닥만큼 작은 창이 열려 있고 그곳을 통해서 텔레비전 소리와 아이들의 말소리가 함께 튀어나오기도 했는데 정작 안은 캄캄해서 무엇이 무엇인지 잘 구분이 가지 않았다. 불이 켜진 집을 보니 집이 너무 작아서 방과 거실과 부엌이 구분되어 있지 않았다.

그 골목을 지나는 동안 아들은 뒤쪽에서 걸었고 나와 딸은 앞에서 걸었다. 딸이 가끔씩 셔터를 누르다보니 골목 사람들의 시선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은 길거리에서 불을 지펴 음식을 끓이기도 했고 더러는 빨래를 하기도 했다. 아이들까지 뒤섞여 혼잡한 골목이었는데 가끔씩 트라이시클까지 지나다녀서 마치 아수라장 같았다.

                                  

골목이 끝나가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는데 끝에 바다가 가로막고 있어서 가던 길을 밟아와야만 했다. 돌아 나오는 동안 우범지대 같은 느낌 때문에 마치 탈출을 하는 것 같았다. 생각해보니 그 당시 우리는, 선입견이나 편견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 같다.

골목에서 나와 오른쪽으로 돌아드니 다시 시장이었다. 살만한 건 별로 없었지만 다시 시장을 훑어 봤다. 헌 물건을 취급하는 가게가 더러 있었는데 익숙한 느낌의 물건이 눈에 띄기도 했다. 쳐다보면서 우리가 버리는 옷이나 신발이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필요한 물건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점심을 해결해야 했기 때문에 여기저기를 눈여겨보는데 마땅한 식당이 눈의 띄지 않았다. 우리는 결국 프랜차이즈 식당으로 들어갔다. 한국의 롯데리아 점 같은 분위기의 식당이었지만 음식이 다양해서 골라먹을 게 많았다. 끼니때마다 먹지만 질리지 않는 볶음밥을 선택했고 돈가스도 시켰다. 나는 계란 프라이와 쇠고기 볶음이 놓여있던 사진속의 접시를 선택했는데 메뉴의 이름은 기억하지 못한다.

저녁에는 딸과 펜팔을 하던 필리핀 아가씨와 그녀의 친구를 만났다. 업타운을 가기 위해 지프니를 탔다. 지프니는 그 이후로 한 번도 타지 못했는데 이유는 버스처럼 코스가 정해져 있기 때문이었다. 누군가를 붙들고 버스나 지프니의 행선지를 묻는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기사와 말이 통할지도 의문이었다.

지프니는 트럭의 뒷칸에 의자를 놓고 사람을 태우는 대중교통수단이다. 우리나라의 전동차처럼 의자가 마주보게 되어있는데 정원보다 승객을 많이 태워서 거의 포개 앉아야만 했다. 기사가 멀리 있기 때문에 돈을 주기까지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야 하는데 그런 과정을 보고 있으니 나름 재미도 있었다. 승객들이 마치 한 가족 같은 느낌이랄까. 생판 모르는 사람과 찰싹 달라붙어 행선지를 가야 한다는 것. 필리핀은 사계절이 아니라 늘 여름이니 신경질이 날 법도 한데 승객들의 표정이 나쁘지 않다.

 

아얄라 몰은 필리핀의 열악한 환경에 비해 매우 으리으리했다. 구경을 위해 몰려드는 사람이 참 많은 것 같았다. 나름 유명하다는 식당에서 저녁을 먹었는데 줄이 길어서 한참 기다려야 했다. 야자 잎에 싼 닭고기 찜과 돼지 도가니 튀김이 유명하다는 식당이었다. 가격을 보니 고급레스토랑에 속하는 것 같았다. 밥이 무한 리필인 그 식당은 밥을 퍼주는 아가씨가 따로 있었고, 아가씨 허리에 밥통이 매달려 있었다.

식당을 나와 택시로 간 곳은 미스터 에이라는 레스토랑이었는데 위치가 높아서 타워라 불리는 곳이었다. 남산처럼 야경을 볼 수 있었는데 탁자 위에 초가 켜져 있어서 나름 운치가 있었다. 우리는 커피와 산 미구엘을 마시면서 이야기꽃을 피웠다. 나는 그들에게 이멜다를 잘 알고 있다는 얘기를 했고 그들은 꽃보다 남자라는 드라마에 대한 얘기를 했다. 또한 배우들에 대한 관심도가 높아서 한류 열풍을 짐작할 수 있었다. 도중 그들이 장자연에 대한 질문을 했기 때문에 나는 화들짝 놀랐다. 무엇 때문에 이슈화된 사건인지 그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 얘기를 하다 보니 시간이 꽤 지나 있었다. 마침 누군가가 내리던 택시를 발견하고 그 택시를 잡았다. 둘 중 한 아가씨는 중간에서 내렸다.

업타운과는 달리 다운타운은 이미 잠들어 있었다. 택시에서 함께 내렸지만 아가씨가 지프니를 타야했기 때문에 정류장까지 데려다 주어야 했다. 텅 빈 거리를 지나야 했는데 거지들만 눈에 띄었다. 그들 중 한 가족은 빌딩의 문 앞에서 잠들어 있었고 남자 거지들 너덧 사람은 마주 앉아서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사람들이 거의 자취를 감춘 거리가 오히려 무섭게 느껴져서 우리는 종종 걸음을 쳐서 숙소로 돌아왔다.

다음날 보라카이로 가야했기 때문에 일정에 대해 의논을 했다. 깔리보 공항에서 내려 까띠끌란의 선착장까지 가야하고, 거기서 배를 타야만 하니 복잡한 일정이었다. 보라카이의 선착장에서  보라카이의 숙소까지는 한참 가야한다는 게 딸의 말이었다. 그래서 픽업을 해야만 하고, 깔리보까지 픽업을 나오는데 한 사람당 600페소라한다. 1800페소라면 한국 돈으로는 54000원에 가깝다.

여행가이드 북을 들춰보니 훨씬 싼 가격으로 갈 수 있겠다 싶었다. 우리끼리 가자하니 이미 호텔측에 픽업 나오라는 전화를 했다한다. 나와 딸이 옥신각신하는 걸 보고 아들이 끼어들었다. 아들도 얘기를 들어 보더니 누나가 틀렸다고 한다. 아무튼 딸은 성질을 버럭 내더니 통화를 해서 취소를 하든 말든 알아서 하라는 것이었다. 소통의 어려움이 많아서 딸이 그런 선택을 했던 것 같지만 당시에는 나도 화가 많이 났었다.

그렇다고 해도 지나치게 많은 돈을 주면서 갈 필요는 없었다. 딸이 눈물을 흘릴 때까지 싸워서(?) 픽업을 취소시키기로 결정했다. 취소를 해서 얻은 소득은 자그마치 800페소이다. 그 이야기는 보라카이 편에 부연설명 하기로 한다.

이튿날 세부에서 깔리보 공항으로 가는 도중 아름다운 섬을 보았다. 숙소에서 태워주던 승합차 안에서 내가 내리고 싶다고 하자 딸이 눈을 흘겼다. 막탄이라는 이름의 그 섬은 세부에 여행 오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머물다 가는 곳이란다. 우리가 만약 막탄에 묵었다면 세부의 좋은 점만 기억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보라카이로 가는 비행기를 기다리는 동안 상당히 흥분되었다. 필리핀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섬으로 가는 비행기를 기다리는 중이었으므로.

 

 

 

 

 

김은숙   2010-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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